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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골룸바의 일기
작성자조경희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8 조회수401 추천수2 반대(0) 신고
"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갈라 5,1.13-18)
 
정말 육과 영이 반대되는 것이 맞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내내 몸이 고달프고 불편해야 한다는것 인데,
이왕이면 육과 영이 둘다 편안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저 생각 같아서는, 육과 영을 동시에 편하게 하고도 얼마든 하느님을,
섬길수 있을것만 같은데요. 아니, 육과 영이 동시에 편안할때에,
비로소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따를수 있을것 같은것이,
우리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닐까요.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살면서 육신의 부자유를 참으로 많이 겪습니다.
여러가지 크고 작은 일들에 속박이 되어서 자유롭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예를들어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들의 경우,
젊어서 내내 직장에 얽매여 자신의 모든 시간과 꿈을 그곳에 올인합니다.
깊은 신앙심으로 하느님을 아무리 만나려 해도,
자신이 처한 상황속에서 하느님을 위해 할수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엄마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저도 아이를 키우지만, 임신 순간부터 '나' 라는 존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것만 같습니다.
모든것이 아이에게 맞추어 지고,
때로는 자식이 나의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섬김을 마땅하다,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엄마들의 삶입니다.
 
자녀들은 자녀들 나름대로의 공부 스트레스가 있을겁니다.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시절에도,
물론 요즘 같지는 않았겠지만 학원과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분명 있었습니다.
청소년 미사에 다녔었는데, 가끔 시험때가 되면,
전체 학생의 절반정도만 자리를 지켰었습니다.
사실, 저희 엄마까지도 시험때 꼬박꼬박 미사에 나가는 저를 보시며,
오늘은 성당 가지 말고 집에서 공부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성당에 가고픈 제가 엄마 눈치를 살피며,
구박속에 성당에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모든것이 육적인 부자유, 얽매임 그리고 속박일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그 무엇이,
바로 나의 육을 얽매고 있을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들에게는 직장이, 엄마들에게는 자식이, 자녀들에게는 공부와 미래가,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될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삶속에서는 이러한 육적인 부자유와 얽매임이 그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의 영을 위해 육을 과감히 내던져 버리셨습니다.
당신의 육신뿐 아니라, 당신과 함께했던 사람들 마저도,
그분의 길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어떤것에도 얽매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오직 '아버지' 한분 뿐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께서 당신께 바라시는 그길...
예수님께는 오직 아버지 한분 뿐이셨기 때문입니다.
 
어제 복음말씀에 (루가 9,51-62), 이방인의 마을인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두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실갱이를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참으로 피하고 싶은 마을이 분명합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냉랭함과 차가움만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은 그 길을 피하고 싶었고, 돌아가고 싶었으며,
내심 벌이라도 내려 혼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결코 피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삶속에서 당신 영을 거슬러 육의 행보를 따르셨던 일은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아무리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길 이더라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셨던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은,
나중에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던,
첫번째 장소가 됩니다.
과거에는 발길도 하고싶지 않아했던 곳이,
첫번째 복음선포의 장소가 되다니요.
달라진것, 변화한 것이 있었기에 가능한일 이었습니다.
 
바로 '성령'을 받기 전과 후의 달라짐 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전 육의 욕망을 따르던 사람들이 더이상 아니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그들의 육을 기꺼이 버리고 장렬히 순교할수 있는 용맹한 하느님의,
군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피하고 싶었던 그곳이,
이제는 가장 먼저 찾아가 복음을 전할 마을이 되어버린것 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불처럼 활활 타올랐을 것이고,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방해가 될수 없었던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비로소 따를수 있는 첫발걸음을 떼었던것 입니다.
육을 거슬러 성령께서 바라시는  길을 갈수 있는 힘을 얻은것 입니다.
'성령' 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인정머리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며 부탁하는 제자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시며, 그의 부탁을 단칼에 잘라 버리십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는 일은,
자식된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고, 하지 않아서는 결코 않될 일입니다.
평생을 불효자로 살았던 자식이라 할지라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사는 치루어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것을 너무잘 알고 계셨을 주님께서,
구지 이렇게까지 말씀 하셨던 것은 왜일까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해야한다 여기는 가장 중요한일 마저도,
당신을 따르는 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바라시는 일을 가장 먼저 행하라 가르치고 계신것 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라는 가장 극한 상황을 들추시며 가르치고 계신것은,
그 밖의 모든 사소한 상황들을 다함게 포함시키고 싶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어떤 일도 주님을 따르는 길에 결부시켜,
핑게댈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행하며 살아왔던 길을,
과감히 돌이켜 '예수님의 길' 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찾아 떠나야 하는데,
그일이 쉬울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고,
그 길의 첫걸음을 떼는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첫걸음을 떼십시요.
부족한 것은 주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길로 접어들때,
비로소 우리의 육이 자유로워지며, 속박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어둠은 우리에게 날마다 속삭입니다.
육을 거슬러 성령께서 바라시는 길을 간다면,
우리의 몸은 너무나 불편하고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길은 정작 우리의 몸을 자유롭게 하시며,
참 사랑을 향해 새털같이 가볍게 날아 오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빛속에 날마다 따스할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세상을 이겨낼 우리들이 될것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을 읽고 잠시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로 앞에 세워두고,
 사람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 보는구나.
 그런 이들은 결국 그 길을 돌이켜 나를 등져버리더구나.
 내가 들려준 쟁기를 보아라.
 그것은 나의 일을 하기위한 도구이다.
 세상에서는 그 도구를 쓸모없다 할것인데,
 그들은 쟁기를 들고 어디를 가고 있느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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