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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다른 것과 틀린 것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9 조회수1,019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다른 것과 틀린 것

 


 

살다보면 처음부터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잘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자매와 이야기하던 중, 실제로 MBTI (성격유형검사) 검사 결과를 놓고 보았더니 서로간의 성격이 정 반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주는 좋은 일인 것입니다.

만약 둘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데 성격이 똑 같은 두 사람이 결혼하였다면 그 가정은 온전하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이성적이면 다른 한 사람은 감정적이어야 온전하고 한 사람이 직관적이면 다른 사람은 경험을 중요시 할 필요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검사대로라면 한 사람은 반드시 한 성격만 갖고 그와 상반되는 성격은 덜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향적인 사람이 동시에 외향적 성격까지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완전해지려면 자신이 갖지 않은 성격을 지닌 사람과 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모 둘 중 하나가 아이를 야단치면 한 명은 아이를 달래주고 타이르는 성격도 필요하단 뜻입니다.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그래서 상대방을 더 완성시켜주고 풍요롭게 해 주는 요건이지 불평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다름을 받아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좋은 관계들을 갖고 자신을 완성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국어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강론을 하고나면 가끔 신자들이 저의 틀린 문법을 교정해 주곤 합니다. 그 중에서도 “틀리다”와 “다르다”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에 많은 주의를 받았습니다.

다르다는 뜻은 두 개 이상의 것이 서로 같지 않다는 뜻이고, 틀리다는 뜻은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성격을 이야기 할 때는 서로 틀리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것입니다. 틀린 것은 바로잡아야 하지만 다른 것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것입니다.

 

일치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완전히 똑 같다면 오히려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미사 때 사제가 성체를 둘로 쪼갭니다. 두 조각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자들이 보도록 들어 올릴 때 다시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두 조각이 아니라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서로 나눠질 때 하나가 튀어나오게 잘리면 다른 하나는 그만큼 들어가게 되고 혹은 다른 하나의 모서리가 조금 들어가게 잘리면 또 다른 하나의 면은 그만큼 더 튀어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끝이 서로 반대로 들쑥날쑥 해지게 되기 때문에 마치 톱니바퀴처럼 두 개를 붙이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서로 같이 튀어나오거나 같이 들어가 있다면 두 개를 서로 하나로 붙이지는 못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태극기의 음양이 조화되어 서로 하나가 되는 그림을 상상하면 쉬울 것입니다. 결국 음과 양이 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사로 다릅니다. 마치 태극기의 음양처럼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되는 음양이 합쳐져 하나의 원이 되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가 합쳐져서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모여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록 남자와 여자의 관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신부들이고 그리스도는 신랑입니다. 마치 성광 안에 성체가 들어와야 비로소 참 성광이 되듯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아담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로 새로 태어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때 비로소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으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동성연애자들이라 할지라도 참다운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남자역할을 하면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성이 같을지라도 여자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한 몸을 이룰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요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을 한 몸이 되도록 사랑할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사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모든 관계 안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보며 “아버지, 당신과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서로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따라서 모든 관계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삼위일체 신비의 복제판이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가 모든 관계의 모델이고 그 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지는 사람만이 비로소 하느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작 때도 예수님은 이런 ‘다름 안의 일치’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랐다면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람이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할 정도로 강하지 못하였다면 바오로는 열정 하나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바오로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으로 성경에 바오로 서간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매우 그 내용이 신학적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여 유다인들을 위해 전교하기로 하였지만 바오로는 유다인들 외에 이방인들을 선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유다인을 또 한 사람은 유다인 아닌 사람들을 위해 사도가 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이 합하여 모든 민족을 선교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만으로도 바오로만으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다른 이 두 사람이 합쳐져야 비로소 온전한 모든 인류를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어디를 가든지 항상 베드로와 바오로가 함께 서 있거나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둘은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서로 받아들여 온전한 하나의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한 번은 바오로가 베드로를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 있을 때,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자 베드로가 그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을까봐 밥 먹다 말고 살짝 자리를 뜨는 것을 바오로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더 이상 구약의 할례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도답게 행동하지 않자 바오로는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를 심하게 나무랍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사람에 따라 ‘다른’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틀린’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틀린 것은 이렇게 서로 충고하며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오히려 더 풍성하게 하고 하나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있어도 이위일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합쳐져서 온전한 교회의 상징이 되었듯이 오늘 두 사도를 공통으로 기념하지만 이 둘이 일치하는 데는 그 안에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제가 나뉘어진 빵을 서로 모아서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 혹은 성체 조각을 성혈이 있는 포도주에 넣지 않으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제가 하는 역할을 해 주는 제 삼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 둘은 영원히 반쪽으로 남게 되지만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서로 하나가 되어 온전한 자신을 완성하게 됩니다.

베드로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바오로가 있어야 온전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다른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모양대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화형을 당하였고 바오로도 그리스도의 순교를 따르기 위해 칼로 목이 잘립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었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형 방법이 달랐지만 그리스도의 순교와 그 피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축일을 함께 지냅니다. 물론 더 깊은 뜻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교회는 혼자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사랑의 일치’ 안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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