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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6.3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30 조회수400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6.30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아모5,14-15.21-24 마태8,28-34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참으로 통쾌한 예언자 아모스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현실에도 해당됩니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바로 위로 아래 좌우사방 옆으로 소통이 원활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불통에서 파생되는 온갖 사회문제요 질병들입니다.

예언자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세상은

바로 공정이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실현되어야 할 이상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낙관적이기 보다는 비관적입니다.

반복되는 인간 현실이요 역사 같습니다.

자연환경, 사회환경, 교육환경, 가정환경, 교회환경

어디 온전한 데 없이 모두가 탁합니다.

비전이, 희망이 보이지 않으며 조화와 균형도 잃어갑니다.

 

얼마 전 아산병원에 가기 위해

한강 지류의 큰 내를 건너며

물속에 큰 잉어들을 신기하게 바라본 일이 생각납니다.

오염으로 탁해 보이기 이를 데 없는 물 위에

마치 죽어 떠다니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점차 오염된 세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오염된 죽음의 물에서 물고기들은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 또한 오염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으로 시달립니다.

하느님 선사하신 자연에다 방방곡곡 고층 아파트 감옥을 짓고

문 꼭 닫아 놓고 감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점차 자연을 좀 먹으며 도시화하는 모습이

꼭 국토라는 몸에 번져가는 암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도시화에 따른 폐해는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자연과 인위의 조화와 균형이 살 길 인데,

자연이 병들고 죽으면 사람 또한 병들고 죽는데…

자연을 압도하는 인위의 문명이 정말 폭력적이며

이의 적나라한 표현이 4대강 사업입니다.

 

이상과 현실이,

자연과 인위의 문명이

조화되고 균형 잡힌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전례가 이상이라면 삶은 현실입니다.

전례와 삶이, 기도와 노동이 조화되고 균형이 잡힐 때

건강한 영성생활입니다.

전례와 삶은 하나입니다.

전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전례는 삶을 통해 실현되고 삶은 전례를 통해 표현됩니다.

예언자가 질타하는 현실은

전례와 삶이 따로 노는 고립 단절된 전례행위입니다.

예언자 아모스의 비판이 참 신랄하고 직설적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대변합니다.

 

“선을 찾아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

  공정을 세워라.

  나는 너희의 축제를 싫어한다.

  배척한다.

  나는 너희의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제물도 받지 않고,

  친교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우리의 거룩한 전례 이면의

정의와 사랑, 노동의 삶을 보시는 하느님이며 예언자의 눈입니다.

정의와 사랑, 노동의 삶이 빠져버린 거룩한 전례 참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크뤼니 수도원과 많은 수도원들 이런 원인으로 망했습니다.

 

“시끄러운 노래를 집어치워라.

  수금 소리도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위로 아래로 원활한 소통의 사회가 바로

공정이 물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양 극단은 금물입니다.

자연과 인위의 문명,

농촌과 도시,

전례와 삶,

기도와 노동의 조화와 균형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얼마 전 인터뷰 기사 중 균형감각에 대해 읽은 좋은 글이 생각납니다.

 

“균형감각이 중요하죠.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이런 말을 했어요.

  균형감각이란 약 극단의 중간점이 아니라

  오히려 양 극단을 오가면서 최적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답은 한쪽에 있지 않고 항상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제 세상을 그런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바로 이게 중도, 중용에 관한 정의입니다.

이래서 가장 적절한 해답을 찾고자 중의를 모으기 위해

공동체 회의를 하고 대화를 합니다.

고정된 균형과 조화가,

중도의 길이 아니라

부단히 찾고 소통할 때 나타나는 최적점의 답입니다.

부단한 소통 중에 조화와 균형이요

공정이 물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요 교회요 가정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해집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상징하는바 바로 불통으로 미쳐버린 사람입니다.

 

‘마귀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질 수가 없었다.’

 

바로 무덤은 고립 단절된 현실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고립 단절의 불통으로 무덤에서 배회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탐욕, 분노, 질투, 열등감, 나태, 무지, 허영, 교만 마귀와

온갖 중독 마귀에 제 정신을 잃어 버려 불통일 때

내면은 황폐해져 저절로 그 심성은 거칠고 사나워질 수뿐이 없습니다.

모두가 조화와 균형의 상실로 인해 자초한 재앙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마귀들은 쫓겨나고 살아난 마귀 들린 사람입니다.

마지막 장면이 의미심장합니다.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였다.’

 

감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소유물의 마력은 참으로 큽니다.

하느님과의 소통과 이웃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

조화와 균형,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전례와 삶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삶의 꼴을 잡아주는 전례요,

전례가 좋아야 삶이 좋고,

삶이 좋아야 전례도 좋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소통을 원활케 하시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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