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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좋은 선입관을 갖게 하라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04 조회수698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14 주일 - 좋은 선입관을 갖게 하라

 


 

저는 지금 아일랜드 더블린에 와 있습니다. 날씨가 시원하니 참 좋습니다.

어제 도착했는데 도착하면서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마중 나오시는 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숙소에 와 보니 핸드폰이 없어진 것입니다.

자주 있는 일이라 분명히 제가 앉았던 자리에 떨어져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차 열쇠를 빌려서 공항에서부터 타고 온 차 안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제가 탔던 조수석 자리를 아무리 아래위 훑어보아도 핸드폰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공항에서 핸드폰을 흘리고 왔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 한 아들이 핸드폰을 들고 들어와 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어디서 찾았느냐고 물으니 차 조수석 의자 위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아차 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운전석이 우리나라와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 운전석은 왼쪽이고 여기는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조수석이라고 생각하고 운전석 의자 아래 위만 열심히 뒤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운전석에는 핸들도 있고, 계기판도 있는데, 그 좌석이 조수석이라는 선입관을 가지니 핸들도 계기판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바로 옆 좌석에 눈을 돌렸으면 되었겠지만 그 좌석은 운전석이라는 선입관에 아예 눈을 돌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사람이 선입관을 한 번 잘못 가지면 있는 것도 보이지 않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무서운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선입관은 사실 이것보다 무섭습니다. 서품을 받고 보좌신부로 가게 되면 여기저기서 앞으로 함께 살게 될 주임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많이 듣게 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하는 심정으로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접해보고 살아보면 주임 신부님은 그 수많은 말을 들었던 분과는 아주 다른 분임을 알게 됩니다. 정말 수많은 말을 들으며 가졌던 선입관들을 버리는데 꽤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비됩니다.

그래서 다음번에, 또 누구에 대해 사람들이 미리 이야기를 해 줄 때는, “쉿,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마! 내가 살아보면서 알아갈 거야.”라고 말합니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선입관을 갖게 하는 말들은 삼가야합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 날 배반하러 밤중에 혼자 나갈 때도,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가는 줄을 다른 사도들이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가리옷 유다를 감싸주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가리옷 유다를 감싸주고 좋은 이미지를 갖도록 그에 대해 제자들에게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리옷 유다의 나쁜 점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갈 때도 의심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쁜 선입관이 아닌 ‘좋은 선입관’을 갖도록 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입관을 갖게 하는 것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좋은 선입관을 갖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가면서 떨어져나가는 콩깍지를 다시 부부의 양 눈에 씌워주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파견하시면서 많은 당부를 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며,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는 식의 당부만 하십니다.

실제로 복음 선포를 해야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이 단 한마디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즉, 복음 선포하는 내용보다는 제자들의 행동지침에 대해 더 신경을 쓰시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 내용은 ‘하느님나라’만 선포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강론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고, 행동 강령을 내리는데 치중하셨을까요? 바로 사람들이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좋은 선입관을 갖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올바른 행동을 보면 이미 90%는 복음전파에 성공한 것입니다. 좋은 선입관을 지닌 사람이 말하는 것은 곧 진리로 그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행동이 옳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코웃음만 받게 됩니다.

만약 사람들의 눈에 제자들이 좋게 보이기 시작했다면 그 때부턴 아무리 어눌한 말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더라도 좋게 들리고 아름답게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선입관을 가졌을 때 핸들도 계기판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그 사람의 인간적인 단점은 보이지 않고 좋은 선입관대로만 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사제의 해가 끝났습니다. 사제의 해에 가장 본받아야 할 모델로 교회가 제시했던 성인이, 프랑스 아르스의 성자,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입니다.

이 신부님이 사제의 모델이 되신 것은 공부를 잘 해서도, 강론을 잘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 분은 라틴어를 몰라 몇 번을 과락을 당하시고 간신히 신부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주일강론을 준비하실 때도, 일주일이 걸렸는데, 한 번은 써 놓은 강론 원고를 잊고 미사 때 들고 들어오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론 시간이 다가오자 비안네 성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한 마디만 하고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고 합니다. 한 번 원고를 썼다면 대충은 기억이 날 듯도 싶은데도 신부님은 그렇게 남들처럼 말을 잘 하는 기술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분에게 고해성사를 받겠다고 멀리서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하루에 평균 16시간이상 고해소에 앉아 있어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합니다. 그 분 때문에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느님나라가 그 아르스 시골에서 시작하여 온 유럽 방방곡곡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복음 전파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 번은 당연히 해야 할 기도나 공부도 하지 않고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텔레비전 연속극을 몰아서 보는 신학생에게 이렇게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밖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중 하루 6시간 자기도 힘들어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너는 그렇게 많이 자고 놀기만 하고 공부나 기도도 게을리 하면서 어떻게 나중에 사제가 돼서 신자들에게 잘 살라고 강론할 수 있겠냐?”

그랬더니 그 신학생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사는 게 무슨 상관이에요. 예수님 말씀만 잘 전달해 주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만 잘 가르쳐주면 되지.”

어쩌면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라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먼저 제자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복음 선포는 사제나 수도자, 선교사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복음 선포를 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시듯이, 복음 선포를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의 장례나 치르고 있는 죽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랑은 가장 귀한 것까지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신앙을 옆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듯이, 믿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입으로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행동으로 먼저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착한 행실을 보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어떤 말을 하든, 그 사람들 안에 좋은 선입관이 들어와 다 믿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행동 없이 말로만 전파를 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반감만 사게 됩니다.

어쩌면 최근 십년 간 가톨릭 신자수가 80% 가까이 증가한 반 면 말로 하는 선교에 중점을 두는 다른 종교들은 선교를 그렇게 강조함에도 제자리 수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이 말보다는 삶으로 세상 곳곳에서 하느님나라를 조용하게 전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 너 나를 사랑하느냐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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