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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5시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04 조회수717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 25 시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 첫 사제 순교자이시자 대표 성인이십니다. 오늘은 특별히 그 분의 ‘강인한 자아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위해 오랜 세월의 고생을 하셨지만 실제로 사목을 하신 것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볼 때도 아깝지만 당시 정부에서 볼 때도 김대건은 매우 아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어린나이에도 외국 언어와 문물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런 인재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위협과 회유로 김대건을 살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단호히 거절하시고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전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다면 김대건은 더 이상 김대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상은 천주교를 박해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 밖에 공생활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유다인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한 30년 정도 더 복음을 전하셨다면 더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셨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타협하셨다면 더 이상 예수님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으시려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만 하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시면 더 이상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나 예수님이나 세상과 타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기보다는 ‘내가 누구인지를 떳떳이 밝히고’ 박해와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내가 내가 아닌 채 살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유명한 문필가인 C. V. 게오르규(Constant Virgil Gheorghiu) 는 ‘25시’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인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해 줍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한 모리츠라고 하는 주인공은 루마니아의 가난한 농부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평범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영문도 모르는 채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그가 아무리 루마니아 인이라고 해도 누구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갖은 위험을 겪으며 그가 수용소를 탈출하여 간 곳이 헝가리입니다. 헝가리에서 그는 이번에는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유로 잡혀서 고문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루마니아는 독일과 연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헝가리 정부에 의해서 독일로 팔려가게 되고, 독일에서 인종학자 뮐러 대령을 만나게 됩니다. 뮐러는 그를 독일의 ‘영웅족’의 표본이란 판정을 내립니다. 졸지에 그는 독일인의 표본이 되고 독일 군인이 됩니다. 그는 자신을 속이며 살 수 없어 연합군인 프랑스 포로를 구출하여 미국진영으로 탈출합니다. 연합군은 그를 영웅 대접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적성국가의 시민이란 이유로 그를 감금하고 그는 13년간의 세월을 모진고생을 하며 수용소에서 지내게 됩니다.

작가 게오르규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자신이 겪은 비슷한 경우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삶과 그것을 통해 만들이진 ‘25시’라는 소설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재판관은 요한 모리츠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합니다. 요한 모리츠는 자신이 누군지 자신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는 유대인, 루마니아인, 독일인, 적성국가 시민 등으로 취급당했지 단 한 번도 ‘인간 요한 모리츠’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아 상실의 현실을 코루가 신부는 ‘25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25시란 마지막 시간이 지나버린 폐허의 시간, 상실의 시간, 구원이 없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도 구원해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시간 밖으로 인간을 내어 몰아 참다운 자신을 살게 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김대건 신부님이 세상과 타협하여 정부를 위해서 일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김대건 신부가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 있는데 정부와 타협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세상과 타협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는 있지만 이미 자아를 상실한 채 25 시의 공간에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상적인 시간 안에 머물기를 원했고 그래서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참 개인의 자아대로 살아가려면 세상의 박해를 각오해야합니다. 세상은 어떤 때는 유대인이 되기를 요구하고 어떤 때는 독일인, 어떤 때는 미국인이 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의 박해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타협한다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맙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25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사탄의 소유이고 사탄은 이 세상의 힘을 이용해 사람들을 온전한 자아 밖으로 내몰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실 때는 자아 정체성을 혼란하게 하는 세상에서 당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저희 동기신부 하나가 고해성사 주다가 고해성사 하던 신자에게 멱살을 잡힌 일이 있습니다. 그 신자는 주일을 몇 번 빠졌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사업상 골프를 쳐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 신자가 그렇게 주일미사를 빠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듯이 그렇게 고해를 하였기 때문에 저의 동기신부는 더 성찰을 하고 오시도록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제의 멱살을 잡고 네가 가족을 먹여 살리겠느냐고 하며 사죄경을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죄경도 해 주지 않았는데 그 신자는 나중엔 영성체까지 하고 갔다고 합니다.

누구를 탓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형제의 정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자녀입니까? 하느님의 자녀는 당연히 아닙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멱살을 잡으며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세상이고 자신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타협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만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잘 살 수는 있지만 참 자신은 죽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하느님나라도 들어가면 좋겠지만 이 세상은 이미 사탄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탄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에게 절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너에게 주겠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세상은 모두 사탄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세상을 모두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절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예수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사탄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 유혹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더 많은 유혹거리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번 아일랜드에 간 일이 있는데, 아일랜드가 수백 년 간 영국 성공회의 모진 박해도 이겨내면서 지켜왔던 신앙을, 박해가 없는 지금, 단 10년 만에 잘 살게 되면서 순식간에 신앙을 버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과의 타협이 얼마나 인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김대건 신부님의 모범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지금도 우리 앞에 박해와 자아 정체성, 혹은 타협과 자아상실의 선택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 둘 중에 우리는 단 하나의 선택밖에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나 자신을 세상에 맞추어가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날 미워하든 좋아하든 당당히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성호를 긋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정말 나는 진정 이 세상 누구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입니까?

 

 

 

   

 
< 기도>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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