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제가 당신의 이웃이 되어드릴게요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11 조회수719 추천수11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15 주일 - 제가 당신의 이웃이 되어드릴게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목록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이태리어를 로마에 와 학원에서 처음 배울 때 저희 반 선생님은 약간은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에게 대하는 것과 동양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눈에 띄게 차이가 났습니다. 단 두 달만 그 학원에 다니면 되었지만 그 선생님 때문인지 언어 배우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아일랜드 와서 방학동안 영어를 배웠는데, 그 때의 선생님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편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저에게 조금 나쁜 감정을 가졌는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것을 물어보고 조금 틀려도 너무 세세하게 교정해 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마다 ‘내가 또 뭘 잘못했지?’ 하며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은 이태리어를 배울 때처럼 선생님과 관계가 좋지 않아 힘들지 않기 위해서 제 스스로 지나치게 영어 선생님에게도 잘 보이고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 좋지 않았던 기억이 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힘들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추어가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여쭈어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자세히 생각하면 율법학자의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이지 누가 나의 이웃인지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지 생각하는 것은 주위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주위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 사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를 싫어할 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학자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하지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만약 전성기 때의 타이슨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경기하는 상대는 아마추어 권투선수들이라고 합시다. 타이슨은 그저 링 위에 올라가 즐기다 내려오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타이슨이 아니라 비슷한 수준의 선수라면, 겁을 먹고 상대의 약점을 검토하고 소심한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피고 있다면 내 안의 사랑이 충분히 강하지 않은 것입니다. 참 사랑이란 아무 두려움 없이, 아무 상대나 사랑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고 강도를 당해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우리 각자이기도 하고, 또 크게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상대가 누군지 가리지 않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줍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골고타 언덕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우리 영혼은 사탄과 육신과 세상의 횡포로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야 할 운명을 지녔습니다.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건강한 사람이 인간을 치료해 주고 구원해 주어야 하는데 사제와 레위사람은 그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사제와 레위사람은 성전에서 일하는 이스라엘의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식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건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자신들이 부정하여져서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례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모르고 헛된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려는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고 나머지는 그 사랑의 증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도와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란 성전의 전례에도 참여하지 않는 이방인 중의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사실 유다인들로부터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시고 그렇게 부정한 인간으로 박해당하고 버림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만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주셨습니다.

왜 하필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발라주었을까요? 술과 기름은 상처를 씻고 살균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보면 포도주는 자신을 으깨어서 나오는 인간의 피와 같은 것입니다. 미사 때 포도주가 무엇으로 바뀝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바뀝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으깨어 나오는 희생의 피로 인간의 상처를 씻어주었습니다.

기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루카 4,18절에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장면만을 읽어도 기름이 성령님을 의미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즉 성령님을 받은 자를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에게 성령의 기름을 바름으로써 또 다른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성령의 도유를 받고 새로 태어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골고타 언덕에서 그대로 일어납니다. 역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상처받은 인간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써 요한의 상처를 닦으시고 치유해주십니다. 비유에서의 포도주는 여기서 피를 상징하고 기름은 여기에서 물을 상징합니다. 피가 죄의 상처를 씻는 것이고 물이 성령님을 상징한다는 것은 다 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대표하는 요한은 골고타 언덕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인 예수님 덕분으로 다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돈을 주면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맡기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일이 있어 잠깐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약속을 하면서 여관주인에게 치료와 회복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관주인으로 상징되는 성모님께 요한을 맡기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도 성모님은 항상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강림이 있을 때도 사도행전은 성모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고 계셨음을 잊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떠나신 지금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꾸준히 치료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분은 성모님 외엔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은 그들을 아들로 삼아 계속 보살펴 주십니다.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내어 주시고 요한을 아들로 만들어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성모님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가 성모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물론 성령님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 인이 돈을 여관 주인에게 주고 떠났듯이 성령님은 언제나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모님을 통하여 교회에 성령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가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하면 좋은데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기적을 청하는 성모님께 “이것이 당신과 나에게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으십니다. 그것은 “은총을 성모님의 청으로 교회에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들은 성모님은 교회의 사제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성사를 집행하며 교회에 새로운 포도주인 성령님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성모님의 청이 있었음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청이 아니었으면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을 것처럼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청해주시는 성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꾸준한 치료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서의 당신의 삶을 우리에게 똑 같이 실천하며 살도록 명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던 자신의 희생으로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성령님을 부어주며 성모님께 그 사람을 맡기는 일입니다.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따라서 선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것이고 착한 사마리아 인이 아닙니다. 반대로 상처받은 영혼을 성모님께 데려오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치료해 주기 위해서는 포도주와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작은 희생과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착한 사마리아 인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누구를 만나든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어머니께 데려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 내가 천사의 말 한다 해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