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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13 조회수338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7.11 연중 제15주일

신명30,10-14 콜로1,15-20 루카10,25-37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제 핸드폰과 인터넷은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인간 소통의 욕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서로간의 소통을 위한 핸드폰이듯

하느님과의 소통을 위한 핸드폰도 꼭 구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과의 소통을 위한 핸드폰을 지녔는지요?

 

하느님과의 소통을 위한 핸드폰은 바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하여 피정에 오는 이들은 서로 간 소통을 위한 핸드폰을 꺼놓고

하느님과의 소통을 위해, 기도 핸드폰을 켜놓습니다.

침묵과 고독 중에 기도 핸드폰을 켜놓을 때

정말 많은 진리를 체험하고 깨닫습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체험한 사람만이 압니다.

 

얼마 전 장시간 면담 성사 후 수사님들의 소임지 방문 중

내려 쬐는 뙤약볕 속에 배 밭 사이 길을 걷던 중 하늘을 보니

하얀 뭉게구름이 꿈처럼 떠있었습니다.

순간 기쁨에 솟아난 다음 글입니다.

올 여름은 이 글을 묵상하며 더위를 식히려 합니다.

 

“뙤약볕/열정, 흰 구름/순수, 샘솟는/기쁨, 이래서 좋다/여름”

 

침묵 기도 핸드폰을 통해 들려 온 깨달음의 글입니다.

몸 하나에 딸린 것들은 왜 이리 많은지요.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몸 하나 먹고 자고 입고 일하고 살아가는데

왜 이리 고단하고 힘들게 살 수뿐이 없는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래서 소유에 중독, 노예 되어 살지 않도록,

깨어 단순 소박한 본질적 삶을 사는 것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기도 핸드폰을 늘 켜 놓고 살아야 합니다.

피정 중인 어느 자매님의 말도 새삼스런 깨달음이었습니다.

 

“여기 수도원 피정 집 방이 잘 정돈되어 있고 아무것도 없으니

  참 편하고 잠도 잘 옵니다.”

 

세상 짐들 가득한 세상에서,

세상 집 방에서 눌려 지쳐 살다가

빈 방에 몸 하나뿐인 피정 집 방이라

홀가분한 해방감에 잠도 잘 올 수 뿐이 없습니다.

이래서 현대인에게 피정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어느 분의 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 핸드폰 화면에는 ‘묵연(黙然)하라’라고 적혀있다.

  수년째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문구로 , ‘말없이 그러하다’라는 뜻이다.

  내 친구의 핸드폰에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라고 적혀 있다.

  이 문구도 내가 평상시에 즐겨 쓴다.”

 

이분 또한 기도 핸드폰을 늘 켜 놓고 깨어 사는 분임이 분명합니다.

말없이 묵묵히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말없이 그러하다’라는 ‘묵연하라.’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결론과도 같은 두 짧은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불교 종정 법전 큰 스님의 자서전의 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가봐.’ 이 말은 내가 상좌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며

  거기서 조금 더 보탠 말은 ‘가, 밥먹어라.’였다.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기도 했지만

  수행자에게 ‘수행정진하라.’는 말 밖에는 모두 군더더기다.

  …한 해에 한 번 내 생일에 상좌들이 모이면 늘 하는 한마디가 있다.

  ‘밥값 해라.’ 이 말 말고는 세월이 가도 더하거나 덜 하는 것이 없다.

  내 상좌들을 앉혀 놓고 늘 하는 이야기는 하나였다.”

 

하여 저는 오늘 강론 제목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로 정했습니다.

머리말이 길어졌습니다.

말없이 그렇게 사는 진실한 삶의 방법을 소개해드립니다.

 

 

 

지금 여기 가까이서 사십시오.

 

시선을 밖에서 안으로,

저기에서 지금 여기로,

겉에서 속으로,

남에게서 나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안에 있습니다.

이 구원과 행복 또한 선택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면

어디서도 하느님을 못 만나고, 하늘나라를 살지 못합니다.

지금 여기가 불만이면 어디를 가도 불만입니다.

말없이 그러하라, 묵연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말없이 사랑하고 믿고 희망하며 주어진 삶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자연 만물이 역시 늘 말없이 그러하기에 진실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신명기 모세의 말씀,

바로 밖에서 방황하지 말고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는 계명은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며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무 변명이나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누구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패한 자가 바로 복음의 율법교사와, 사제와 레위인이라는

거룩한 종교인들이라는 사실에 놀랍습니다.

우리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는 경종이 됩니다.

반면 여기서 성공한 자는

복음의 사마리안 사람이라는 사실 역시 놀랍습니다.

우리 종교인들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늘 말씀대로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교사는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삶과 신학이 유리된 삶입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신학 속에 삽니다.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머리로 삽니다.

그러니 늘 목마른 영혼이며 샘솟는 활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많이 알면 무엇 합니까?

하느님을, 사랑을 맛보지 못하고 변두리만 맴돌다 끝내는 삶이라면

너무 공허하고 억울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가까이 생명수를 놓고 목이 타는 똑똑한 바보 율법교사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똑똑한 바보들 널려있는 세상입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주님의 물음에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율법교사는

이미 머리로는 답을 꿰뚫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진정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며 이렇게 살았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보라고, 묵상하라고 있는 관상용이 아니라

살라 있는 실천용인데 이를 까맣게 잊고 산 율법학자들,

바로 신학자들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간단명료합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권위와 힘이 넘칩니다.

실제 말씀과 하나 되어 사신 분임이 단박 들어납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여전히 깨닫지 못한 율법교사의 질문입니다.

애당초 처음 질문부터 진정성이 결여되어있음을 봅니다.

이런 자세로는 정말 배우지 못합니다.

주님의 인내와 배려가 놀랍습니다.

진정 스승의 사표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로

율법학자를 궁지에 몰아넣은 후 항복을 받아냅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의 내 중심의 관점을 180도 바꿔

‘곤경 중에 있는 이웃이 되어 주라’ 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일체의 변명과 핑계의 기회를 봉쇄해 버리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곤경 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살 때 바로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유별나거나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발견되는

바로 지금 여기 실천할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꼭 필요한 사랑입니다.

 

 

 

세상의 중심 그리스도의 교회에 뿌리를 두십시오.

 

세상을 보는 눈에도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밖과 안을, 겉과 속을, 거기와 여기를, 남과 나를, 세상과 교회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상과 현실, 기도와 노동, 전례와 삶을

동시에 보는 균형과 조화의 시선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래야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중심에 뿌리를 둔 삶이, 신앙이 절대적입니다.

개인 신앙은 약하여 곧 시들고 변질되기도 쉽습니다.

2천년 그리스도의 교회인 천주교는 하느님의 지혜의 보고입니다.

주님만을 따라 살았던 무수한 성인들의 삶의 모범이 있습니다.

아무리 퍼내어 써도 마르지 않는 교회의 샘, 교회의 보고입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바로 온 우주의 알파이자 오메가이신,

시작이자 목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고,

그분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론인지요.

온 우주와 역사를 망라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이 참 고무적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에 모시고 깊이 뿌리 내릴 때

그리스도를 닮아 균형과 조화로운 삶,

이웃과 세상에 활짝 열려있는 삶입니다.

지금 여기 땅의 현실에서 하늘의 이상을 삽니다.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본다는 어느 시인의 말도 있듯이

지금 여기 곤경 중에 있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어찌 보면 강도들을 만나 초주검이 된 불쌍한 이는

바로 곤경 중에 있는 그리스도일 수 있습니다.

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님 같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인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처신했으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우리 모두에게 부과된 평생과제입니다.

 

 

 

지금 여기가까이서 사십시오.

 

늘 말씀대로 그렇게 사십시오.

 

세상의 중심 그리스도의 교회에 뿌리를 두십시오.

 

이래야 말없이 그러한 묵연한 삶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을 실천하며

충실하고 진실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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