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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과부의 애절한 원한은? (루카복음18,1-43) /박민화님의 성경묵상
작성자장기순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3 조회수89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루카복음18장
 
루카복음18장은
루카복음15장인 회개의 장과
지혜의 장인 루카복음16장과 루카복음17장에서
영적인 나병환자 예화를 통하여
나병과 같은 치유 불가능한 원죄의 사함을 받은 사람이
루카복음 18장에서 하늘 나라를 찾고 구하고, 청하는데
 
바리사이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나오는데
바리사이들의 기도는
사람의 의로 착하고 잘난척하면서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시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워서가 아니라
루카복음 15,16,17장의 내용이 이루어져서 회개하고 통과되어야만이
죄의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저희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하고
겸손하게 드리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받아들이는 예화를 통하여,
세리들의 기도가
즉 루카복음 15장 16장 17장이 통과된 사람의 기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미사 중에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라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다 계시지만
하느님이 요한복음 차원에서는
우리 안에 우리 심령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외국에 갔을 때 외손녀들과 식사를 하는 중에
하느님의 현존을 보고 있는가를 손녀들에게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 봤을 때
고등학교 다니는 손녀는 손으로 하늘을 가르켰지만
일곱살 먹은 손녀는 가슴을 가르키면서  "in my heart." 라고 해서
하느님이 무엇으로 안에 계시냐고 다시 물어 봤을 때
손녀가 대답하기를 "Love."라고 답해서 내가 안아 주면서   
"Love, joy, peace로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신단다."라고 말했을 때
손녀가 그렇다고 말을 해서
그 자리에 모였던 온 가족들이 어린 손녀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보고 느끼게 되
그날 저녁 식사는
말씀과 성찬의 잔치로 기쁨이 가득한 저녁식사가 되었으며
저와 온 가족은 하느님께 감사 찬미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들도 하느님을 보는 눈은
눈 코 귀 혀 피부 오감과 육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말씀을 깨달아 깨달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고 깨어 있는 사람이며,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및 성령의 힘으로 깨달아 알고 보기 때문에
말씀을 깨달았을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사드리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감사와 찬미를 바쳐야하는 것입니다.
 
세리처럼 의로운 기도는
율법의 의와 사람의 의로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계속적으로 회개하고 
"내 탓이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는
과부와 고아는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들이 과부이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이 고아들이지만
 
하느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영적인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님이시고
영적인 신부들은 남자와 여자 모든 성도들을 말하기 때문에
순결한 신부들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과 사는 사람들이 순결한 신부들이며
예수님도 믿고 다른 신도 믿을 때는 영적으로 간음한 여자들이 되며
예수님이 말씀으로 우리 심령 안에 거처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아니 계시면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영적으로 과부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과부들이 원하는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원한을 푸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느님께 시간도 때도 없이
영적인 남편인 예수님을 달라고 조르고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귀찮아서 과부의 원한을 들어 주신다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도 매일매일  말씀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때
영적인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며,
 
고아도 하느님이 우리 안에 아니 계시면
우리들이 하느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영적인 고아들이며
영적으로 하늘나라에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방인이고 외국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원한을 들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복음 선포를 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영적인 남편인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호로고스가 없는자,예수님이 아니계신 사람)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설명:
땅이란 말은 세상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즉 육의 식구들을 말하며
"육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오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할 때
하느님께서 공짜로 주신 성령의 은사입니다.
(마태복음 10,36; 로마서 8,5~7; 로마서 10,17)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우리는 기도할 때
바리사이인들처럼 자기 자신들을 드러내는 기도를 하지 말고
죄인을 대표한 세리들처럼 회개하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생명이며 진리의 빛이신 생명 말씀이 들어와 비추어 줬을 때
아가페 사랑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보게 되는데
자기 안에 어둠을 보는 사람은 깨달은 분이며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소경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죄인 티를 보고 판단하며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빛과 소금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생명이고 빛이고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게 되면
사랑으로 계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기도를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묵상하고
세리들처럼 용서와 자비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우리 모두는 세리들처럼 죄인들이기 때문에
잘난척 착한척하지 말고 겸손하게 기도하는 삶으로 살아갑시다.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설명:
우리들도 육적으로 볼 때는 살인이나 간음을 거의 하지않고
어떤 착한 부인이 말씀을 전하면서
나는 일생동안 한 번도 간음하지 않고
한 번도 살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이 부인은 육적인 간음이나 육적인 살인을 말하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화를 내면
분노의 결과로 말과 행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
영적인 살인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아니 계시면
세상과 짝짝꿍 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이 되므로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은 우리 모두가 거기에 해당될 수 있으며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영적으로
간음과 살인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세리처럼 늘 회개의 기도를 합시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설명:
단식도 육적인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단식이지만
영적인 단식은 음식에 관계없이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 가면서
말씀의 열매인 사랑으로 살아 가는 것이 영적인 단식이기 때문에
매일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한 사람은
매일매일 단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도
전에는 사순시기 매주 금요일마다 단식을 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는
사순시기가 시작 되는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이 돌아 가신날인 성금요일
즉 2일만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회개)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설명:
육의 마음은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심령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
우리들의 마음이 말씀을 통하여 죽고 변화 되는 과정이
육신은 한 번 죽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들 마음은 죽었는가 하면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신령체 부활때까지 계속 마음을 죽이고 비워야 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죽고 다시 부활하고 계속되어야 되는데
 
우리들 마음이 살아 있으면
작은 결점을 말해도 화를 내고 싸우고 하는데
심령이 죽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진리인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일을 하게 되면 낮아 지려고 하고,
겸손의 열매를 맺으면
봉사할 때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없어지며
"봉사할 때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을 하며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어린 아이들은 원죄는 유전되어 있지만
아직 원죄인 선악과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며 마음이 없는 것이며
엄마가 일을 하면서 전화가 왔을 때
다섯 살 먹은 아이보고 "엄마 없다," 하라고 말했을 때
 
이 아이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엄마가 없다고 하라고 하십니다." 하고 전화에다 말을 하는데
이처럼 어린아이들은 원죄는 있지만
아직 원죄의 여독인 선악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미웁다, 예쁘다라고 판단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어린 아이들이며 하느님 속성에 가까우며
 
이 어린 아이들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선악으로 살아가지 않고
사랑의 열매로 살아가고 있음을 계시해 주시며
이 어린 아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상징해 주시며
또는 어린양, 송아지, 소자 등등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5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6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문자적으로 보면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세상 지식을 많이 알고 율법에 매여있는 사람이 부자이기 때문에 
세상 지식과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은 마음을 바꾸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믿어 복음 말씀으로 살아가면서
심령안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마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한 영으로 부활하여
하느님의 속성인 사랑,기쁨,평화들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며,
 
성모님과 사도들과 성인들과 신약의 성도들이
복음을 믿고 살아 가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며
복음의 삼덕은 청빈(가난), 정결, 순종인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 결과적으로 아가페 사랑이 오는데
아가페 사랑의 결과로 가난한 삶을 살고,정결한 생활을 하며
하느님께 순종하게 되는데
삶으로써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성인들이
사랑이 충만했을 때 순종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고등학교 다니는 남녀학생이 사랑의 절정에 도달할 때
남학생은 여학생 말에 순종하고 여학생은 남학생 말에 순종하는데
이때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처럼
리들도 하느님 말씀이 충만하여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
비로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8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20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1 그가 예수님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셨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3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24 예수님께서는 그가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26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따름과 보상 (마태 19,27-29 ; 마르 10,28-30
)
 
모든 신자들을 대표로 한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루카복음1 8,35에서
예리코의 맹인 한 사람을 치유하시면서
 
베드로 사도가 마음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그 생각마저 버리지 아니하면
베드로 보고 영적 소경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물론 세상에 육적인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음에 의식인 즉 에고를 즉 자기 의를 버리지 아니하면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에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마음을 죽이고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영적인 사람이 되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에서 출애굽하여  
하늘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진리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계시해 주는 것이며
여기에서 베드로 대신에 나를 넣어서 묵상해 봅시다.
 
세상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때 큰상인
하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는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것이 큰 상을 받는 것입니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설명:
하늘 나라가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며
공관복음에서는 눈에 보이는 하늘 나라는 교회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는 예수님 안에 있으며
영차원인 요한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현세와 내세가 나오는데
현재를 살고 있는 이 세대와 죽은 후에 오는 내세를 말하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구약차원에서 내세는 공관복음이고
공관복음 차원에서 내세는 요한복음차원이기 때문에
영적 차원이 바뀔 때 내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는
우리들의 육신은 한 번 죽고 신령체 부활하지만
우리 심령은 마음이 죽었는가 하면 살아나 있고
살아 있는가 하면 죽어 있고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말씀하시는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비교급과 최상급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최상급으로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하느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말하는데
우리들의 마음이 완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님마음으로 변화가 되었을 때
아가페 사랑의 마음으로 변하여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레마로 일을 하게 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예수님으로 보이며,
 
운전할 때 다른 차가 끼어 들어도 "예수님!" 하고 양보하고
결점을 말하고 싸우려고 해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아! 주 예수님께서 저 사람의 입을 통하여
나의 결점을 말해 주시는구나."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됐을 때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세 번째 일어난 사건의 예화이며
마음이 완전히 죽은 사람이 이제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3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32 사람의 아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질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침 뱉을 것이다.
33 또 채찍질하고 나서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4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설명:
말씀이 열리는 것이 복 받는 것인데
마태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을 4복음서라고 말하며
이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인데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복음이 선포되고
이 복음 말씀을 읽고 깨달아
거룩한 진리 말씀이 열리는 것이 축복 받은 것이며
 
마태복음 5,3에 진복 선언이 나오며
묵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때가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그리스도를 보는 눈인데
우리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데 자기 안에 사랑으로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보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알며 자기가 어둠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신의 어둠을 입으로 토해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 현재 부활한 사람이며
자기 안에 사랑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하느님을
보고 느끼고 만지고 체험하며
자기 안에 존재하는 사랑의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이웃 형제 안에 있는 사랑의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으로 보게 되며,
 
사랑의 하느님을 못 보는 이유는
우리들이 율법에 있기 때문에 어둠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욕심에 있기 때문에
생명의 빛이며 진리의 빛이며 사랑으로 계신 하느님을 못 보는데,
 
요한복음 8장에서
감음한 여인을 율법으로 볼 때는 돌로 쳐죽여야 되지만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볼 때는
빛이고 생명인 나(예수님)를 만나지 못해서
어둠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생명인 나한테(예수님) 왔으니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랑으로 보면 깨달은 분이고 보는 사람이지만
율법이나 미움으로 볼 때는 눈먼 사람이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며
죄를 짓는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예수님께로 인도합시다.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 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 (마태복음5,3;마태복음7,7)하고 있다가,
 
설명:
'어떤 눈먼 이'라고 되어 있지만
헬라 원문에는 '튀프러스' 인데
단수이기 때문에 한 사람을 말하는데
루카복음 18,28에서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했을 때
네가 버렸다는 마음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영적 소경이라는 것을 실제로 소경 하나를 치유하시면서
베드로의 영적 상태를 치유하는 예화를 통하여
오늘날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로마서10,17)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메사아 믿음)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마태복음5,7;루카복음11,41)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기도)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영)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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