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도둑을 보고 크게 웃었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3 조회수407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마태오 13:18-23)
 
학자들은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초기의 그리스도공동체가 해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화를 설명하는 것은 농담을 설명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 재미가 없게 만든다. 과거의 역사가 있는 우화가 아니라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 지금까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우화를 묵상을 해보아야 한다. 물론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묵상은 그들의 경험을 술회한 것이다. 그들이 해석한 것을 보면 말씀을 듣는 네 형태의 청중(聽衆)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씨앗(말씀)이 길에 떨어지거나, 돌밭에 떨어지거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좋은 땅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마태오 13:2-9)
여태까지 우리 선조들도 그러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로 네 형태 중에 하나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공중전파를 통하여 군중이 형성되게 되고 네 종류의 청중(聽衆)이 된다. 그리하여 어떤 종류의 청중이든 무리가 되어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여론은 한 날개밖에 없어서 한쪽으로 기울여져 비스듬히 날아간다. 그래서 일찍이 푸르타크가 말했다. “군중을 거스르면 군중의 손에 망하고, 군중을 따르면 군중과 함께 망한다.” 

페르시아의 성인(聖人) 루미가 쓴 『마스나위』에 이의 모순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언자 다윗 시대에
당신께서 저를 연약하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만드셨으므로 일하지 않아도 매일 저에게 빵을 주십시오.’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바보스러운 끈기를 비웃었지만 그래도 계속하여 기도했다.
마침내 그의 기도 덕분에 암소 한 마리가 집에 뛰어 들어왔기에 그는 암소를 잡아 먹었다.
이는 신께서 어떤 기도보다도 성실한 사람의 기도를 좋아하신다는 예언자의 말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물이 신을 찬양하지만 무생물의 찬양과 사람의 찬양이 다르듯, 수니 교도의 찬양은 자브리(Jabri) 인들의 찬양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잘못을 말하지만 세속을 초월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모른다.
나름대로의 지혜와 확신 때문에 여론이 갈리게 된다.
이 때부터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마음 속에 진리의 시금석을 간직하고 있는 신성한 사람이 아니면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두 의견 사이를 헤매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둥지로 날아간다.
지혜는 두 날개를 갖고 있지만 여론은 한 날개밖에 없다.
여론은 연약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비스듬히 날아간다.
날개가 하나뿐인 새는 금방 떨어져서 두 걸음 정도 퍼덕거리며 날아간다.
여론의 새는 그의 둥지에 갈 희망을 갖고 한 날개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날아간다.
여론의 새가 여론에서 벗어나서 지혜를 알게 되면 두 날개를 얻게 되어 여론과 지혜 사이를 오간다. 그 뒤로는 ‘비굴한 얼굴을 하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바른 길을 곧 바로 날아 오른다. 그는 마치 가브리엘 천사가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표리부동하지 않고 헛소리를 하지 않듯이 두 날개로 힘차게 날아 오른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그에게 ‘당신은 확고하게 하느님의 길을 가고 있소.’하고 말해도 더욱더 정진할 뿐만 아니라 고귀한 영혼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소. 당신은 미풍에도 흔들리는 풀 잎사귀지만 당신 자신을 바위라고 생각하고 있소.’하고 말해도 비난에 못 이겨 여론에 빠져들지도 않고 군중의 증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조금도 나쁜 생각에 빠지지 않고 원수의 비난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말을 듣지만 정작 자신의 말은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화나 신문이나 라디오나 잡담과 같은 쉴 새 없이 강요하는 여론과 아이디어의 잡음(雜音)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의도적으로 에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막았다면 더 이상 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비우는 것이다.그러나 이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제대로 들어 의미를 깨달았을 때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운다는 것은 텅 빈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비운다는 것은 세상은 우리들이 일을 멈추어도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오늘날의 결점인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행동주의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다. 무저항이 수동적인 사람들의 게으름인 것처럼 행동주의는 활동적인 사람의 게으름이다. 문제는 행동주의가 전혀 게으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덕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다. 지금의 세상은 행동주의를 최고의 미덕으로 칭찬하고 있다. 말씀의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멍하게 될 때가 있다.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텅 빈 마음에 생명의 싹이 돋는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가 젊었을 때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굶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밤 도둑이 들어와서 책상 자물통을 열려고 하다가 침대에 누워서 도둑질하는 것을 보고 있던 발자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자 대경실색(大驚失色)을 했다. 도둑이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물었다. “왜 웃었어?”
발자크가 대답했다. “내가 하루 종일 찾다가 못 찾은 돈을 네가 캄캄한 밤중에 돈을 찾으려 드는 것을 보고 웃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했다.”
길바닥과 돌밭과 가시덤불은 에고이다. 에고의 목소리는 들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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