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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5 조회수749 추천수1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veryone in debt to us,
and do not subject us to the final test.
(Lk.11.2-4)
 
 
제1독서 창세기 18,20-32
제2독서 콜로새 2,12-14
복음 루카 11,1-13
 
“내 삶에 있어 하느님께서는 어떤 위치에 계실까?”

어제 묵상 중에 문득 들은 생각입니다. ‘곧바로 하느님은 제게 있어 첫 번째 자리입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필요할 때만 첫 번째 자리라고 외쳤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인가가 필요할 때, 고통과 시련이 다가와 스스로 견디기 힘들 때에만 하느님을 찾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일이 없을 때, 세속적인 일로써 즐겁고 신날 때에는 하느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기보다는 완전히 잊고 살았을 때도 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이는 내 기도 내용을 보면 쉽게 느낄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것만을 계속 청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을 위해 바친다는 기도 역시 결국은 자기만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노처녀가 항상 “주님, 저에게 멋진 신랑감을 내려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 기도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지요.

“하느님께서는 자기만을 위해 바치는 기도는 잘 들어주시지 않아. 남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기도만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단다.”

그러자 이 노처녀는 곧바로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하느님, 제 부모님께서는 잘 생기긴 사위를 보내주시고, 제 동생에게는 멋진 매형을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제 할아버지에게는 능력 많은 손녀사위를 보내주십시오.”

결국은 누구를 위한 기도일까요? 바로 자기를 위한 기도였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이 바치고 있는 기도가 이렇게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부터 청해야 하는지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라면서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낼 수 있도록 찬양을 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곁에 올 수 있도록 청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곧 의식주, 죄의 용서, 시련 극복 등을 청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내가 먼저고 그 다음에야 하느님께 찬양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내가 필요한 것을 얻고서도 하느님께 찬양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제까지 잘못된 기도를 바치고 있었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끈기와 신뢰가 필요합니다. 한 밤중에 빵을 청하는 친구의 비유처럼 끝까지 매달리는 끈기와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무한한 신뢰 없이는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끈기와 신뢰를 갖춘 기도. 그리고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기도를 바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날개 부러진 새와 같다(미치 앨봄).




갈 데 없는 사람(이명랑, ‘위로’ 중에서)

“넌 싸우면 갈 데도 없냐?” 남편의 말에 아내는 질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이니까요. 몇 해 전 무남독녀이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내는 찾아갈 친척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내에게 이제 가족은 남편뿐이지요.

남편은 곧 후회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습니다. 논산행 버스를 타고 아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로 찾아갔지요. 아내의 동창이 학교 서무실에 근무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1학년 7반이었다는 것, 4학년 때는 반장이었고, 졸업하던 해에는 학교를 빛낸 어린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았습니다. 아내의 친구는 연락도 없이 찾아와 이것저것 묻는 그가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왜 찾아왔느냐고요.

“언젠가 아내가 그러더군요. 어릴 적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요. 어머니 혼자 홀몸으로 먹고살기 빠듯한 데다 자주 이사를 다녀 사진을 챙길 겨를이 없었던 거지요.”

남편은 아내의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내에게 유년을 되찾아 주고 싶다고, 그러니 도와 달라고. 늦은 밤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화풀이하듯 욕조를 닦는 아내의 등 뒤로 다가가 이름을 불렀습니다.

“** 초등학교 1학년 7반 김수지!”

그러고는 사진첩을 건넸습니다. 사진첩 갈피마다 아내의 유년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지요. 아내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어렵게 구한 사진이었습니다. 아내는 사진첩을 끝까지 넘겨 보고는 다시 고무장갑을 꼈습니다.

“내가 싸우면 갈 데 없어서 집에 있는 줄 알아? 안 가는 거야!”

그러고는 공들여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싸우면 갈 데도 없는 처지가 아니라 세상 그 누구와 싸워도 늘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지도 말이지요.

 
 
 
 
 
 
 Ai no katachi (shape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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