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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항상 커지는 사랑의 본질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5 조회수818 추천수17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17주간 월요일 - 항상 커지는 사랑의 본질


 

결혼을 앞둔 신앙이 깊은 한 커플이 혹시 혼배성사를 하고 동정부부로 살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박해 시대 때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동정으로 살기를 원하는 두 남녀를 함께 살게 한 예는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인이라는 말 안에는 둘만 함께 일치하여 산다는 것을 넘어서서 자녀를 출산하려는 의도가 있어야합니다. 지금은 박해가 없기 때문에 동정으로 살고 싶으면 얼마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인을 한다면 그 혼인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삼위일체로서 부족함 없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시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당신 안에 가두어 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당신의 사랑과 행복을 인간에게까지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부도 둘의 일치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그 사랑이 자녀를 출산해 그 자녀에게 퍼져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나 행복은 자신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퍼져나가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당신 안에서의 사랑에만 만족하셨다면 세상도 인간도, 지금의 나도 창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도 그보다 더 클 수 없이 크신 분이시지만, 세상의 창조를 통해 더 크게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있어서는, ‘일’ 더하기 ‘일’은 항상 ‘이’보다 커야 합니다. 이것이 시너지 효과입니다. 둘이 결혼하여 자녀를 낳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즐기며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이기주의일 것입니다. 사회 구조와 다른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가 저출산율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첫 번째 명령을 가장 거스르는 나라란 의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된 내용은 ‘하늘나라는 점점 커지는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겨자씨처럼 한 사람 안에 자라나기 시작하지만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그 안에서 새들이 쉴 수 있을 만큼 자라납니다. 또 하느님나라는 밀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밀가루가 크게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이렇게 둘만으로 만족하는 사랑이나 행복은 참 사랑도 참 행복도 아닙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행복으로 초대하는 것이 참 행복이고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의 당연한 사랑과 일치의 소명을 제외하곤, 자녀를 많이 낳아 많은 자녀들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는 것만큼 중요한 소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꼭 자녀를 출산하여야만 항상 더 커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사랑도 마찬가지로 많은 영적 자녀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수도회를 만들었을 때 여자로서 처음으로 찾아 온 사람이 글라라였습니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와의 영적 유대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자신의 손으로 재건한 다미아노 성당에 살도록 하고 자신은 걸어서 삼십분 가량 걸리는 거리에 따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글라라는 글라라 나름대로 여자들을 위한 수도회를 만들었고 프란치스코는 또 그 나름대로 남자 수도회를 이끌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결코 가까이 있는 글라라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생각 날 때 장미 밭 위에서 뒹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자신이 지나치게 글라라에게 치우치면 하느님께나 형제들에게 소홀해 질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오히려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글라라를 좀 방문해서 만나라고 독촉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신은 절대로 글라라가 사는 곳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는 곳과 글라라가 사는 곳을 잇는 길가에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제야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도 인간적으로 서로 만나서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인들끼리만 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애정에 갇혀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소홀해 질까봐 만나는 것을 절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퍼져나가는 힘이 있고 이것이 곧 시너지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지금 이 두 분으로 인해 시작된 수도회와 회원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영적으로 더 많은 자녀를 출산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서로간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기찻길이 서로 맞닿아 있다면 그 사이로 가차가 다닐 수 없는 것처럼 서로 간에 일정한 공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그 안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그래서 그 사랑은 참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지옥 끝까지 밀쳐버린 이유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느님도 이렇게 사랑을 더 크게 하시기 위해 둘만 붙어있지 않으시고 최대한 멀리 떨어지셔서 그 공간 안에 교회를 잉태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참 사랑은 둘만이 꼭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을 위해 둘만의 사랑을 봉헌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최대한 멀어져 저승까지 내려가시지 않으셨다면 저승에 있던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오랫동안 기도만 하고 있는 자매를 불러 일부러 공동체에 관련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하느님께만 붙어 있으면서 이웃을 모른 채 한다면 그것은 참 영성도 사랑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내 배우자, 내 자녀, 가족만 꼭 끌어안으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랑을 조금씩 봉헌하면서 그 사이에 사랑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확대되지 않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 그대를 향한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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