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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잔소리----<마스나위> 중에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7 조회수685 추천수17 반대(0) 신고
몇몇 수피들이 그들 지도자 앞에서 다른 수피를 몹시 나무라면서 지도자에게 말했다.
“제발 그를 좀 말려주십시오. 그가 알아 듣게 말해주십시오!”
그러자 지도자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느냐?”
“지도자님,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세 가지 나쁜 버릇이 그에게 있습니다.
(鍾)처럼 시끄럽게 말을 많이 합니다. 또 너무 많이 먹습니다. 잠을 너무 많이 잡니다.” 수피들이 지도자에게 이런 불평을 하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경우든 중용을 취하여라. 무함마드 예언자가 ‘중용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균형이 잡혀있어야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균형을 잡지 못하면 갑자기 병들게 된다.
친구들에게서 너무 많은 잘못을 들추어내지 말아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갈라서게 된다.”
 
(중략)
 
만약 너희가 기도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더럽히고 있으면 “가서 먼저 너희 자신을 깨끗이 하고 오너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가 순수하지 못하고 머리에 든 것이 없기 때문에 너희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너희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영혼의 반려자에게로 가라. 그리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마라!
빨리 잠드는 사람보다 야경꾼이 더 낫지만 깊은 물에 있는 물고기는 야경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루미는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은 사람을 깊은 물에 있는 물고기로 비유하고 있다. 야경꾼은 깨어는 있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서 빨래를 한다. 옷을 깨끗하게 하듯 벌거벗은 영혼은 하느님의 현시로 빛나게 된다. 벌거벗은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물러서든지 네가 벌거벗든지 하라! 이 겁 많은 사람아, 완전히 벗기 싫으면 중용을 취하라!
 
그 수피가 지도자에게 변명을 늘어놓다
그 수피가 지도자에게 변명과 함께 자신의 견해도 말했다. 마치 창조주로부터 받은 영감(靈感)에 따라 케즈르가 모세의 질문에 대답했듯이 그는 지도자의 질문에 제대로 분명하게 답했다. 그는 모든 문제의 열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그는 케즈르로부터 영감(靈感)을 물려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지도자에게 총명하게 대답했다. “지도자시여, 중용을 취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만 중간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낙타에게는 강물이 무릎밖에 오지 않았지만 생쥐에게는 거대한 바다처럼 보였습니다. 빵을 네 개 먹은 사람의 눈에는 두 개 먹은 사람이 적당하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가 잔치를 벌였는데 모든 사람이 탐욕스런 짐승처럼 빵 네 개씩을 먹으면 지나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열 개를 먹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여섯 개를 먹은 사람을 적절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도자께서는 고작 여섯 개밖에 먹을 수 없지만 저는 빵 백 개를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빵 백 개를 먹고도 피곤하게 느끼지 않지만 지도자께서는 저녁 기도 때문에 피곤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맨 발로 메카를 향해 걸어갑니다만 어떤 사람은 기도하러 근처의 모스크에도 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희생할 생각까지 합니다만 어떤 사람은 곰팡이가 핀 빵 하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무한한 높고 낮은 것들 중에서 평균을 취할 수는 있습니다. 누구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듯 중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무한(無限)의 끝을 모르는데 어떻게 중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바다만큼 많은 잉크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모든 나무가 펜으로 바뀌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다 받아 적을 수가 없습니다. 펜과 잉크는 점점 닳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끝없는 말씀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가끔 조는 저를 보고 저가 하루 종일 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만 저의 마음은 깨어 있습니다.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만 저를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무함마드 예언자가 단언했다.
“나의 눈은 자고 있지만 내 마음은 창조주를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너는 눈은 뜨고 있지만 마음은 자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지만 내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에 열려있다. 내 마음은 오감(五感) 외에 다른 감각능력도 갖고 있다. 내 마음의 특별한 감각은 두 세상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너의 좋지 않은 시력으로 나를 보지 말아라! 너에게는 밤이지만 나에게는 낮이다.
너에게는 그것이 지옥이지만 나에게는 쉼터이다. 너희가 하고 있는 힘든 일은 나에게는 휴식이고 기쁨이다(하느님을 찾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진흙은 너희의 발목을 잡지만 나의 장미를 피게 만든다. 너희는 슬퍼하지만 나는 기뻐서 북을 친다. 나는 너희처럼 땅 위에 살지만 하늘에 있는 별들과 행성 너머로 날아갈 수 있다. 나의 그림자가 네 가까이 있지만 나는 거기에 없다. 나의 경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높다. 나는 모든 생각을 초월했으므로 이제 질문을 넘어 “왜?”와 “어떻게?”만 말한다. 건축가가 건축을 지시하듯이, 나는 생각을 지배하여 생각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의 노예인 것은 평생 우울하고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을 때는 선별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파리라면 나는 높이 나는 새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을 제어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나의 선택에 따라 하늘에서 내려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기뻐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천한 일에 실증이 나면 새처럼 날개를 펴서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꾸란 67:19에서는 새들이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공중에 머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의 날개는 내 자신의 내면의 본질로부터 자라며 절대로 나의 날개를 아교로 붙여놓지는 않는다. 자파르(Jafar the Flyer)는 영원히 날았다(자파르는 무함마드의 사촌으로 적군에 맞서 싸우다가 죽자 보상으로 낙원에서 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고 함).
그러나 천한 사람은 잠시 날개를 빌려서 날 뿐이다.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험한 일을 겪어 보아야만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며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게 된다(죽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보아야 참된 진리를 알게 된다).
그러나 야비한 떠버리는 거짓말로 이를 자랑한다.
파리에게는 항아리가 비어 있든 차 있든 마찬가지이다!(파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착한 사람이여, 진주는 네가 먹는 것에서 자란다. 그러니 네가 먹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먹어야 한다(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진리를 발견하여라)
잘못된 생각과 싸워 물리쳤던 지도자도 항아리가 찰 때까지 진주를 토해내었다.
그러나 신비스러운 이 스승은 지혜의 축복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 진주를 의미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너는 네 안에서 음식이 더럽혀진다고 목으로 음식을 넘기지도 않고 진리의 열쇠를 던져버린다! 음식이 영광의 빛으로 변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먹는 모든 음식이 영양(營養)이 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인 진리에 어떻게 반론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
네가 나의 영혼을 잘 안다면 핵심을 찌르는 나의 말들이 전혀 잘난체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만약 내가 한밤중에 너에게 “내가 너 가까이 왔다. 우리는 친척이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하고 말해도 너는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너의 친척이 말하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친척과 이웃이 반론을 제기했다. 네가 들을 귀를 가졌고 신의가 있는 친척이나 이웃이 너에게 명료하게 말한다면 너는 그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기쁜 소리를 듣고는 그가 친척인가 아닌가를 확인한 결과이다. 그러나 친척의 목소리와 나그네의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무지 때문에 그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으로 가득 찬 현자(賢者)의 말은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진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랍에서 한 사람이 “나는 아랍어를 말할 수 있다.”고 외쳤다. 진리는 이와 같다. 그가 아랍어를 말함으로써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자못 흡족한 듯이 “나는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압니다.”하고 종이에 썼다고 하자. 이를 보고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종이에 쓰인 글을 보고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한 수피가 너에게 “어젯밤 너의 꿈에서 지금 네가 나를 보듯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 꿈에서 나는 무아지경에 대하여 길게 설명을 했다. 귀고리가 귀를 뚫고 들어가듯이 나의 마음 속을 헤아려보고 나의 가르침이 네 마음의 인도자처럼 되게 하여라!”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만약 네가 그 수피가 꿈에서 말한 것을 기억해내면 금보다 훨씬 더 값진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보았다면 너의 영혼은 “그런 꿈을 꾸었소.”하고 꿈을 꾼 사실만 인정할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말한 것은 무함마드가 신자들이 낯선 진리에 대하여 방황하는 것을 보고 말한 것과 같다(예언자는 신자들이 이방인들의 지혜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될 때 그 지혜는 본래 이슬람에서 나온 진리이므로 믿으라고 말했다).
네가 진리가 아닌 것을 알았다면 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느냐? 네가 목마른 사람을 보면 “빨리 이 컵의 물을 마셔라!”고 말하지 않느냐?
그러면 목마른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 위선자야! 나는 너를 믿을 수가 없어.
너의 속셈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 물이 하느님께서 주신 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라!
그러면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또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하듯 “가까이 오너라! 나는 네 어머니이므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내가 당신의 젖을 먹기 전에 당신이 어머니라는 것을 증명하시오!”하고 말하겠는가?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예언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기적과 같은 은총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예언자가 말씀을 받아 적으라고 말하면 모두 내심(內心)으로 엎드려 절한다. 그들의 내적(內的)인 귀는 사람이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결코 의심을 하지 않는다. 내적인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면 하느님께서 “나는 바로 네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꾸란 2:186, 간절히 청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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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면 ‘잔소리’라고 싫어한다.
잔소리’를 들은 사람이 평소에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잔소리’를 한 사람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잔소리’를 한 사람이 신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잔소리’일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잔소리’ 취급을 한다.
땅에서 ‘하늘나라’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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