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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모님의 소원 외 6편
작성자김열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9 조회수353 추천수1 반대(0) 신고

부모님의 소원

 

결혼한지 5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었던 나의 어머니는 눈이 먼 딸이라도 하나 낳고 싶다 는, 여늬 사람의 말이 이해가 되셨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세상에 나온 나에 대한, 그리고 나의 동생들을 향한 어머니의 소원은 그저 명길고 복 많아라! 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나에게, 농부가 가믐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비처럼, 온 산천초목에 생명을주는 단비처럼, 유익하고 반가운 사람이 되라 고 나의 이름을 열우(悅雨)’ 라고 지으셨다고 합니다.

나를 비롯, 모든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소원은 ‘올바르고 정직하라!’ 이셨습니다.

 

명길고 복많아라!

올바르고 정직해라!

사회에 유익하고 반가운 사람이 되어라!

나의 부모님이 나를 향하신 소원이 또한, 자녀들을 향한 나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인 우리를 향하신 소원 또한 이와 같으실 것입니다.

창조하신, 참 아름다운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시며, 하느님은,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는 소원을 가지셨습니다.

 

올바르게 살아서, 제 자신이 잘 되고 복되게 사는 것-

그 무엇보다도 부모님과 하느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요?

2010년 7월 21일 오전 6시 33분

 

 

 

 

경제의 원칙

 

학창시절,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 를 창출하여 내는 것이 경제의 원칙 이라고 배운 이후,

나는 모든 경제 생활에 적용하려 들었습니다.

최소의 투자, 최대의 결실, 시테크, 재테크, 다각도, 다양한 활용성등을 떠올리며..

당연히 절약정신과 더불어 이기적이 되고, 풍요로워야 할 인간관계는 소원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속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원칙과 완전히 상반되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또 다른 경제 원칙입니다.

헌신과 봉사가 맺는 결실이 인간생활을 더 풍요로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경제의 목적은 풍요와 여유, 번창, 나아가서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는 경제 원칙은 자칫,

자신의 몫을 늘리는 대신, 상대방의 몫은 줄이게 만듭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만연되어 갈등과 불화가 야기된다면, 풍요와 번영 뒤에 좁혀진 인간관계와 부자유의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비와 햇볕의 혜택을 입은 대지에 쉬지않고 부지런히 심는 투자-

심은대로 거두는 경제의 원칙,

주라! 그리하면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예수님의 천국의 경제 원칙이라야, 진정, 풍요와 번영, 자유를 약속할 것입니다.

2010년 7월 21일 오전 7시 2분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보화

 

재산을 청산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내려올 것이라

영생을 구하던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제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화는,

영원한 생명,

평화,

하느님을 소유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들 입니다.

2010년 7월 21일 오전 7시 8분

 

 

 

 

고 귀

 

재물, 명예, 권세-

얻고자 혼신을 다하는 그것들의 목표는,

누구도 범하지 못할 고귀와 영광의 자리 를 위한 것입니다.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자동차-

누리고자 소원하는 그 목표 역시,

아무에게도 함부로 대접받지 않고자 하는 고귀와 영광의 자리 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

마구간 구유에 누우셨고,

목수의 아들로,

죄인과 병자들의 친구,

채찍과 조롱,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고,

만왕의 왕, 만민의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세상 인간, 그 누구도-

그 이름이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만민을 위하여 희생하신 그 이름, 예수-

천국의 좁은 문을 통과, 구원을 줄, 그 이름 예수-

그는 뛰어난 영광과 존귀의 이름의 주인공 이신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 헌신의 자리가 진정,

고귀와 영광의 자리 인 것입니다.

2010년 7월 21일 오전 7시 18분

 

 

 

 

보 상

평소,

권선징악, 사필귀정을 믿어왔던 터,

요즘 드라마의 주인공 두 사람-

나의 평소 지론이며, 신앙이었던 선의 승리에 대한 회의와 좌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두 주인공들의 특별한 경우와 신분 때문에 입는 불행과,

계속되는 음해 세력, 불의와 야합하지 않기 때문에 덧붙여 당하는 불행들입니다.

이것이 선과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치루어내어야 할, 선과 정의의 대가라는 것일까요?

선과 정의가 세상에서 우대받기는커녕, 그들이 자리잡으려 하면, 적지 않은 값을 요구받는 것입니다.

인권은 하늘에서 받은 천부적 권리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천부적 권리를 지키어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던가요?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피 역시, 선과 정의, 사랑을 위한 값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필귀정,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무색하여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생명을 얻는 길은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힘과 권력, 악한 꾀의 음모가 늘 승리한다면, 선과 정의, 사랑의 보상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멀리 멀리 계시고, 힘과 권력, 악의 도모는 너무도 가깝기만 한 것입니다.

 

선과 악의 보상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 가리옷 유다-

온 인류가 지탄하는 그릇된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아담이 택한 길은, 하느님을 피하여 숨었고, 저주와 사망, 가시와 엉겅퀴를 세상에 들여왔고,

카인이 택한 길은, 땅을 갈아도 더 이상 그 소산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가리옷 유다가 의인을 팔고, 그 죄책감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의 길은 빛이 두려워 숨어 사는 불행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선과 정의, 사랑의 길은,

스스로 빛을 찾아 나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보장이 되어주시니 든든합니다.

정의와 선, 사랑의 보상-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에 지나지 않고,

마침내, 하느님은 선과 정의의 승리를 선언하시고,

잘했다. 충성된 종아! 나의 잔칫상에 참여하여라 말씀하시며,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아껴쓰고, 저축하며, 땀흘려 열심히 일을 합니다.

내일의 풍요를 위하여,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씨를 뿌립니다.

필연, 선과 정의는 승리를 거두는 사필귀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과 정의가 요구당한 희생과 대가에 대한 보상일 것입니다.

2010년 7월 22일 오전 8시 23분

 

 

 

그 어느 곳으로?

하늘 에서 내린 비는 높은 산위 폭포가 되어 낮은 계곡으로 흘러 갑니다.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로, 대양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고귀함은 항상 높은 최고의 봉우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진정 고귀함은 물과 같아서 낮고, 비천함속으로 흘러내려 갑니다.

 

하느님께서 끝이 없이 무한 광대한 우주 만물을 지으실 때,

몇 마디, 말씀으로 조용히 지으셨습니다.

 

빈 수레는 요란합니다.

익지 않은 벼는 고개를 여전히 들고 있습니다.

 

은혜를 갈구하면서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높은 곳에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머무는 곳-

낮고 비천한 곳임을,

믿으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고침받은 곳-

자신의 위용을 모두 벗어 던지고 들어간,

낮고 더러워보이는 흙탕물, 요단강물이었습니다.

 

소경 바르티메오가,

혈루병 여자가,

구원을 얻었던 그 곳-

모두 버리고, 주님의 능력을 믿었던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2010년 7월 23일 오전 9시 1분

 

 

 

 

그마저 극복하여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있었듯이,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이유도,

가리옷 유다가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이유도-

당연해 보일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뱀이 꼬여서..

자신과 함께 하도록 주신 여자가 주어서..

하느님께서 아우의 제물만 받으셨기 때문에..

은 삼십냥의 유혹 때문에..

 

이유와 핑계가 없는 무덤이 없습니다.

감옥역시,

환경이 남달리 불우하여서.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하나, 폭풍이 몰아쳐서..등등의,

필연에 가까워 보일, 이유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세상의 삶이 바로,

이유와 핑계의 대상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세상의 끝이 되어 갈수록, 그 이유들도 필연화되어 갈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려 하여도, 폭풍이 너무도 거셉니다.

악마가 우는 사자처럼, 이빨을 드러내어, 노골적으로 위협합니다.

뉘라서, 이 험한 풍랑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타협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어머니가 딸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죽음에 내어주고 집안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거나, 정신이 나가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버티어 살아갈 수가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거 흑인들은 노예 사냥의 희생이 되기도 하였고,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인종 청소가 공공연히 감행되기도 했습니다.

흠집을 내어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왕따를 시켜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이 공공연히 벌어집니다.

 

세상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벨이나, 선지자, 예수님 같은 희생자들과, 그들을 사지로 몰고 간, 가해자들도 늘어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악이 창궐하고, 그 악에 대한 혐오보다는, 그 시류에 휘말려, 그에 따르지 않고서는 견디어낼 수 조차 없는 사회 구조가 되어지는 때문입니다.

 

이렇다면,

아담과 하와, 카인, 가리옷 유다들의 변명이 양해를 받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변명은 하느님께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문이 얼마나 좁은가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천국의 문은,

당연해 보이는 이유나 핑계, 변명조차 통과 할 수 없을 만큼, 좁고도 좁은 문입니다.

당연해 보이는 이유나 핑계, 변명할 그 유혹이나, 핍박마저 스스로 극복하기를 하느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면죄받아도 좋아 보이는 이유, 핑계, 변명거리인,

유혹이나, 핍박조차도,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내어야만 할,

자신에게 부여된,

자신이 선택하여야 할,

자신의 몫인 것입니다.

 

순간의 선택은 영원을 가름하고,

좁은 문의 선택은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넓은 문의 선택은 영원한 멸망을 가름합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는 스스로 감수하여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 선택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며, 돌이키지 않는 한, 당연해 보이는 변명도, 이유도, 핑계도 그 선택의 책임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그 좁은 문은,

이유와 핑계, 변명이 아닌,

회개와,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써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천둥 벌거숭이 같이 나약한 인간-

사정없이 밀어 닥쳐오는 막강한 유혹과 핍박의, 말도 안되는 시험-

지극히 지당해 보일 이유와 변명조차도 소용없고,

그마저 극복하여라 엄명하시는 하느님의,

좁고도 좁은 천국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0년 7월 25일 오전 8시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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