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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리들 및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마태 9,9-17)
작성자박광호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01 조회수364 추천수2 반대(0) 신고
 

9,9-17 마태오가 받은 부르심

예수께서 바리사이들 및 요한의 제자들과 벌이신 논쟁

기적 이야기 둘째 묶음 다음에, 새롭게 중간에 끼워 넣은 대목이 나옵니다. 이 대목은 예수께서 새로운 제자를 부르신 일로 시작합니다(마태 9,9). 그리고 두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마태 9,10-13과 9,14-17). 그 깊은 주제는, 앞에서 중간에 끼워 넣은 대목에서처럼(마태 8,18-22), 예수님과 당신 제자들의 생활방식입니다. 그 두 논쟁에서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과 친밀하게 일치하여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적들은 예수님에 관해서 알기 위하여 당신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마태 9,11). 또 제자들에 관해서 알기 위하여 예수께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마태 9,14).

마태오가 부르심을 받는 이야기(마태 9,9)는 첫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와 많은 점에서 비슷합니다(참조. 마태 4,18-22). 그렇지만 이 새로운 이야기에는 두 가지 뜻 깊은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를 불러 당신 제자들 집단에 들어오게 하신 사실은 조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리들을 유다인들은 로마에 부역하는 강도쯤으로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그 새 제자에게 ‘마태오’(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 루카 복음서에서는 ‘레위’)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 사실은 첫째 복음서가 예수님의 이 제자에게 돌리는 전승에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이어지는 두 논쟁(마태 9,10-17)은 예수님 시대에 음식을 먹는 일과 단식하는 일이 가지고 있던 의미로부터 출발하여 알아들어야 합니다. 유다교는 먹을 수 있는 음식,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에 관한 엄밀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식에 관해서도 그런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효력을 발휘하고 있던 그 모든 실천 규정은 유다인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속해 있지 않는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 음식 규정을 지키고 동일한 식탁 관습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응집력과 단결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당신 제자들의 태도가 바리사이들 및 요한의 제자들의 눈에 사뭇 거슬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리들 및 죄인들과 드러내놓고 음식을 함께 잡수십니다. 단식 규정을 지키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을 갈라놓는 구분선을 무시하십니다. 기존 체제를 문제 삼으십니다.

예수께서 자주 세리들 및 죄인들과 밥상에 함께 앉으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9)라는 평판을 얻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실천(파락시스)에서 그런 식사 자리는 하느님이 무시당하는 사람들 및 천대 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그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오는 여기에서 호세 6,6을 인용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눈에는 공허한 전례보다 구체적인 자비로운 행동이 더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명(교회의 사명)은 죄인 취급당하는 사람들,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받아들여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 논쟁은 단식에 관한 것입니다(마태 9,14-17). 예수님 시대에는 다양한 종교 집단이 습관적으로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신 답변에서 ‘지금’(당신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랑이신 예수께서 자기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단식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과 ‘다음’(단식을 하는 마태오 교회의 실천을 반영합니다.)을 구분하십니다(마태 6,16-18에 대한 묵상을 참조할 것).

새 천 조각과 헌 옷과 비교하고 새 포도주와 헌 가죽 부대 비교한 것은 여기에서 단식이라는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교는 더 큰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 것과 옛 것 사이의 반명제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움과 유다교의 낡음 사이의 긴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새 것과 낡은 것이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고, 낡은 것이 새 것을 수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완전히 새 것이어서 낡은 것을 단순히 고치는 정도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인 변화와 쇄신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를 요구한다는 말입니다(마태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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