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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고 드라마와 테오 드라마------롤하이저 신부님의 칼럼에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05 조회수919 추천수6 반대(0) 신고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했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 추기경은 우리 인간은 ‘에고 드라마(ego-drama)’ 같이 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연출하시는 드라마 (Theo-Drama)’ 같이 살게 된다고 말했다.
이를 테면 기본적인 에너지를 에고에서 가져오고 에고가 경험하는 감정의 기복에 따라 움직이고 일이 잘 되어갈 때에는 기분 좋게 느끼고 잘못되어 갈 때에는 우울하게 느끼는 삶을 사는 것은 ‘에고 드라마’이다. 따라서 누구나 에고 드라마로 살게 되면 쉽게 용기를 잃고 화를 내고 우울해 하게 된다.
 
반면에서 기본적인 에너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오는 삶을 살면 ‘하느님께서 연출하신 드라마’처럼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게 되면 우리 자신의 에고의 동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의미를 찾고 에너지를 얻게 되므로, 일상생활에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쉽게 용기를 잃지 않게 되고 화를 내지 않게 되고 우울해하지 않게 된다. 이른바 '신앙의 맛'을 제대로 본 사람들의 삶이다.  
 
언제나 일이 잘 되어갈 때에는 자만하고, 잘못되어 갈 때에는 낙담하고 화를 내게 되는 선교활동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를 잘 설명하는 이슬람 설화가 있다.
 
옛날에 아주 성실하고 이상적인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하느님의 은총과 위로를 세상에 전하라는 소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깊은 숲 속으로 가서 원로들에게 배우기로 하였다. 그가 열심히 수행(修行)했으므로 원로들이 그에게 안수(按手)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축복한 후 하느님의 은총과 위로를 전하라고 파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시장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전(午前)에 마을로 내려가 “하느님의 은총과 위로에 대하여 듣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몰려들면 항상 한 원로가 다가와서 “우리들은 당신의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하고 말했다. 그 원로가 젊은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나면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은 늦게 오고 어떤 사람은 일찍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아무 흥미도 못 느끼고 예의상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임이 끝나면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를 초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허무를 느끼고 실망을 하면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이러한 일이 오래 동안 반복되었다.
어느 날 보통 때처럼 마을로 내려가 항상 그가 하던 대로 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원로가 그를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단상(壇上)이 마련되어 있고 자리가 많이 마련되어 있는 마을의 광장으로 데려갔다.
그 날 저녁만큼은 광장에 사람들이 꽉 찼고 늦게 오는 사람도 없었고 일찍 자리를 뜨는 사람도 없이 열심히 그의 말을 듣고 늦은 밤까지 많은 질문을 했다.
그는 그 날밤에는 의기양양하게 숙소로 돌아가서 다음 날 할 강론을 열심히 준비했다. 뒷날 저녁에 광장으로 내려가서 보니 전날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그래서 그가 강단으로 나아가 연설을 하려고 하자 원로가 그의 소매를 잡아 끌면서 “오늘밤은 자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강론할걸세.”하고 말했다.
그날 밤도 아무도 늦게 오지 않았고 아무도 일찍 자리를 뜨지 않고 모두 열심히 듣고 밤 늦게까지 많은 질문을 했다.
그 젊은이는 허무를 느끼고 건성으로 듣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강론이 끝나자 좌절한 채 그의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짐을 챙겨 마을을 벗어나려고 할 때 그 원로가 “왜 우리를 떠나려고 하오?”하고 물었다. 그러자 젊은이가 대답했다.
더 이상 저의 강론이 필요 없는 것같이 느꼈습니다. 강론할 다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 그 원로가 그의 소매를 잡아 끌면서 젊잖게 말했다.
내가 충고 하나 할까? 이틀 밤 동안에 두 사람 모두 자신에 차 있었다네.
그 중 한 사람은 어제 밤에 허무를 느꼈다네. 이틀 동안의 두 사람은 모두 자네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린 자네의 에고였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살면서 자네 본연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겠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추기경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미래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말했다.
인간은 많은 것들을 만들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의 미래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 때의 미래란 내일보다 훨씬 먼 날을 말합니다.
그런데 벌써 내일은 미리 계획되고, 확정되고, 약속된 것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
그가 그렇게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미래를 결정하는 이는 다른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언제가 한 번은 자기 자신의 몽매함과 근시안적인 소견의 벽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날을 넘어서서 앞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미래를, 손에 실을 쥐고 인간을 운명을 결정해 주시는

보이지 않는 분의 손에 맡겨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자기를 인도해 주고, 인생의 모든 어려움까지도 인도해 주심을 느낍니다.
그러니 기도는 무조건적이고, 생활해온 신앙을 전제조건으로 삼아야 합니다.
곧 살아 계시고 구원을 가져다 주시고 인간들에게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전제조건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화로가 꺼져버렸습니다.
이런 삶은 공허하고, 어딘지 모르게 방향 감각이 없고, 미래가 없습니다
.
그래서 기도는 매우 중요하고, 영혼을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자기의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은
,
자기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길거리에서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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