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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음의 준비, 나누어 가난해지는 것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07 조회수737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19 주일 - 죽음의 준비, 나누어 가난해지는 것


 

이태리 한 본당의 장례식을 갔는데 폭염으로 40도 가까이 되는데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성당을 가득 메웠고 바깥 뙤약볕에도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평상시 주일교중미사보다 5배는 더 장례식에 온 것 같았습니다.

그 자매는 암으로 3개월을 선고받고 3년을 살았습니다. 물론 병원에 있으려하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려고 주일학교 교사에서부터 갖은 봉사활동 등을 하며 매일을 마지막같이 살았습니다. 임종 직전의 편안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남편이 아내가 죽기 2-3일을 제외하곤 3년 동안 기적적으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가진 것을 다 주며 죽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하인처럼 깨어 있다가 주님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라고 하시며 자선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는 곧,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라고 하시며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눌 줄 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읽으면 순간 재밌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생활비를 다 바친 그 과부는 굶어 죽었을까?

세상 계산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줌마입니다. 그 돈도 작지만 하느님께서 먹을 것이라도 사라고 준 것일 수 있는데 모조리 다시 바쳤으니 굶어 죽어도 자신의 탓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부가 굶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당장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다른 이야기를 통해 짐작을 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똑 같은 상황이 구약에서도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에도 구차하게 사는 과부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아내와 함께 바알신을 섬기고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다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자신이 입을 열기 전에는 이스라엘에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도망쳤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이방 시돈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의 가난한 과부와 머물게 합니다.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는데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마실 물과 떡을 청합니다. 그 과부는 조금 남은 밀가루와 마지막 남은 기름 한 방울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마지막 남은 것이라도 먹고 죽으려고 나무를 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엘리야는 구운 빵을 먼저 자신에게 주고 나머지를 아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 과부는 미련하게도 낯선 엘리야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다른 곳에는 가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어죽어 갈 때도 그의 뒤주와 기름병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과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부족하지 않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이나 신약의 하느님이나 다르게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하느님께 바치면 하느님께 바친 것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지고 있던 것들도 거룩하여져서 더 많은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만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렙다의 과부는 죽은 아들이 살아나게 되는 은총도 얻게 됩니다. 아들이 갑자기 죽었지만 엘리야는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 아들을 살려냅니다. 하느님께 아낌없이 바칠 줄 알았기에 하느님께서도 아낌없는 은총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주는 것은 사랑인데 그 여인에게 사랑이 있었으니 그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시게 된 것이고 그렇게 은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갖게 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눌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과부는 가뭄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중에 가장 나눌 줄 아는 여인이었고, 결국 자신과 아들까지도 그 나눔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그것은 마지막까지도 나눌 줄 아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나눌 것이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주는 것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돈 백 원도 나누어주기 싫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눈도 주고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나눌 것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모으기만 할 것입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지만 나누지 않는 사람은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도 계시지 않고 그래서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당신께서 먼저 갈릴레아로 가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갈릴레아가 생명을 상징하고 유다 땅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레아에 계셔야지 유다지방에 계실 수 없습니다. 비록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유다로 내려와 죽임을 당하셨지만 다시 갈릴레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할 기회가 있으시다면 이것을 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갈릴레아에 있는 호수가 갈릴레아 호수이고 유다지방에 있는 호수는 사해라고 합니다. 죽은 바다라는 뜻입니다. 온통 염분뿐이기 때문에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주위도 온통 소금밭이어서 아무것도 경작할 수 없는 사막과 같고 바람까지 짜게 느껴집니다. 말 그대로 죽은 바다입니다. 왜 그렇게 됐는가 하면 사해는 수심이 바다보다 400m나 낮기 때문에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모아들이기는 하지만 나누지 않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죽고 주위사람들도 죽입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이와는 반대로 많은 물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요르단강을 통해서 사해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항상 물이 흐르니 썩지 않고 많은 물고기가 살고 주위는 마치 에덴동산처럼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곳도 이 곳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신 것도 이 곳이고 부활하셔서 다시 돌아오려 한 곳도 이 곳입니다. 이곳은 하느님나라를 상징하고 에덴동산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는 사랑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눌 줄 알기 때문에 자신 안에도 생명이 풍성하고 주위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갈릴레아 호수는 마를 줄 모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잘 나눌 줄 아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잘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에덴동산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운전병을 했습니다. 병장이 되어 시간도 남고 다시 학교에 복학도 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잘 때 영어로 잠꼬대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춘천에 군견과 군견 병을 운송하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8개월 만에 처음 접하는 세상은 너무 좋아보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여 선생님과 유치원 아이들이 걸어가는 것을 쳐다보다 그만 신호를 보지 못하고 나오는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군용차는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습니다. 17m를 미끄러져 자가용의 앞부분을 쳤습니다. 워낙 큰 군대 차였기 때문에 자가용은 날라 인도로 떨어졌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사람을 실어갔고 저는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진술서를 받는데 뼈에 금이라도 가면 진단이 최소 3개월 이상이 나오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구속감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어디 부러진 곳이 없었고 차가 떨어진 인도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차도 폐차 직전의 후진 프라이드였고 운전자도 가톨릭 신자라 잘 이야기가 되어 300만원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돈 싸들고 처음으로 저에게 면회를 왔습니다.

저는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차 앞바퀴 쪽을 치지 않고 30cm 더 뒤쪽을 받아서 운전석을 쳤으면 운전자는 아마 죽었을 수도 있었고, 혹은 차가 날아가 인도를 덮쳤는데 그 곳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면 큰 사고가 될 뻔하였고, 그랬다면 나의 인생이 종칠 수도 있었겠구나!’

그러면서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웠던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손에 달려있는데 혼자 잘 해 보겠다고 영어 단어만 열심히 외우고 있었구나. 다 부질 없을 뻔 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더 살 수 없고 단 일원도 더 벌 수 없는 것이구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쉬워집니다. 내가 벌었으니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누기가 아까운 것입니다. 굶어 죽는 나라에 태어나지 않고 한국에 태어난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면 굶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갓 사제가 되어 이동하기 전에 출신 본당에서 이런 강론을 하였는데 한 자매님이 끝나고 나서 왜 그것을 미리 깨닫지 못했는지 자신을 한탄하셨습니다. 며칠 전에 집에 불이 나서 다 타 버렸다는 것입니다. 보험도 들어있지 않고 해서 많은 돈을 날려야 했지만 그래도 깨달은 게 많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는 매를 대서라도 깨닫게 만드는 법입니다. 사랑하니까 깨달으라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읍시다. 첫 번째 해야 할 것이 십일조고 그 다음이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웰빙보다 더 좋은 것이 잘 죽는 것이라고 하듯이, 잘 죽기 위해서는 끝까지 나누지 못해 내 손에 양심의 가책이 될 것을 쥐고 있지 말아야겠습니다. 나눌 때 죽음은 생명이 됩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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