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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복하여라" - 8.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08 조회수409 추천수11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8.8 연중 제19주일

지혜18,6-9 히브11,1-2.8-19 루카12,32-48

 

 

 

 

 

"행복하여라"

 

 

 

오늘 강론 역시 몇 가지 예화로 시작합니다.

 

얼마 전 병원 진료 후,

마침 어느 지인을 만나 모처럼 점심식사로 삼계탕을 먹었습니다.

즐기진 않지만 지인의 성의가 고마워 먹음직스런 삼계탕을 들었습니다.

 

“먹긴 먹었는데도 영 먹은 것 같지 않습니다.”

 

삼계탕을 든 후 허전하여 조용히 지인에게 말하였더니

지인 역시 공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 다른 곳에서 먹어 봐 당장 비교가 됩니다.

  정말 먹을 것이 없습니다. 뭔가 속은 느낌입니다.”

 

발라 낸 뼈도 조금이고 살도 질기고 얼마 되지 않아

먹고 난 뒤에도 배가 고프고 영 마음은 허전하고 씁쓸했습니다.

이어 꼬리를 물고 여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말도, 글도, 행동도, 만남도, 선물도, 삶도 이럴 수 있겠구나.

  들을 때는 그럴 듯 했는데, 듣고 나니 공허할 뿐이고,

  마음 부풀어 글을 읽었는데 읽고 난 후 배신감 비슷한 씁쓸함을 느끼고,

  호들갑스런 행동으로 맞이해 주었지만 웬 지 공허함을 느끼고,

  반가운 만남이었는데 여전히 허전하고,

  선물을 받았는데도 고맙기는커녕 쓸쓸한 마음일 수도 있겠구나.

  삶도 그렇겠다.

  삶의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충만한 삶의 느낌보다는 살긴 살았는데

  뭔가 산 것 같지 않은 공허한 느낌만 가득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줄줄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몸의 언어, 마음의 언어인 진정성은 누구나 직감합니다.

얼마 전 제 말에 제가 상처 받고

한참 동안 괴로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적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이 더 잘 알기에 상대방을 아프게 하기 전

본인이 먼저 자신에 좌절감을 느끼고 아파하게 됩니다.

과연 진정성 넘치는 진실하고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저절로 진정성 넘치는 삶에

자신은 물론 함께 하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묵상하다 보니 전 주일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이 진정성 넘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믿어 주님을 닮아가니 진실할 수뿐이 없습니다.

살아가는데 신뢰보다 큰 자산은 없을 것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라 재기하기가 참 힘들 것입니다.

사실 모든 불행은 불신에서 시작됩니다.

불신에서 불안, 의심, 두려움이 꼬리를 물고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믿을 만한, 신뢰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길은 주님을 믿는 길뿐입니다.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 내려야 산 같은 안정과 평화입니다.

성경에서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님을 감동시킨 것은

언제나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진정 마음의 큰 병은 ‘불신의 병’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세상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믿어야 허무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초연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선미 세상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믿음의 끈을 놔 버릴 때, 안팎으로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오늘 2독서 히브리서의 아브라함은 진정 우리 믿음의 모범입니다.

믿음의 욕심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요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니

믿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순종하여 떠났고,

믿음으로써 그는 약속 받는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렸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하느님의 사람들,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참 축복된 죽음입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으며,

자기네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사실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현세에 살면서도 늘 그 넘어 하느님께 눈 길 두는 믿음입니다.

이방인이며 나그네라는 신원의식이

이 현실이 전부인양 집착하지 않게 했으니 바로 이게 초연한 믿음입니다.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지상이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늘 본향이 우리의 원고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하늘 본향에 대한 갈망이 믿음이요

하늘본향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게 해주는 천상잔치 미사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사람!

 

하느님께 믿음을 둘 때 저절로 초연한 삶이요

하늘에 사랑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세상에 쌓는 보물이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지 알아

하늘에 보물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진정 부자입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돈 많다고, 지위 높다고, 권력 잡았다고,

큰 집에서 산다고 행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국민소득 높아도 행복지수가 낮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말 행복하십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아야 참 행복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한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끊임없는 사랑의 실천이,

끊임없이 나누고 섬기는 삶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늘 은행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정말 안전하고 끊임없는 기쁨과 활력의 샘이 됩니다.

하여 마음은 늘 하늘에, 하느님 곁에 있으니

마음은 깨끗하고 초연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울 수뿐이 없습니다.

끝없는 욕심입니다.

세상 은행에 돈은 가득한 부자들,

사랑 실천 없어 하늘 은행이 텅 비어 있다면 허전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 갔을 때도 하늘 은행에 저축된 사랑을 보실 것입니다.

살았어도 산 것 같지 않고 허전한 것은

하늘 은행에 사랑의 저축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준비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주님께 믿음을 둘 때,

하늘에 사랑 보물을 쌓아 갈 때

저절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에 이은 희망의 삶입니다.

깨어 주님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이게 바로 종말론적 역동적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뿐 아니라 죽음도 사고도 병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옵니다.

그러니 깨어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삶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유별난 삶이 아니라 언제나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평범한 일상에 충실한 삶입니다.

다음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이런 주님의 종이 진정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보아 주든 말든 자기 맡은 소임에 충실합니다.

이게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고 있으며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진정 복된 선종입니다.

늘 제 자리의 주어진 삶에 항구한 삶입니다.

바로 우리 정주 영성에 이에 해당됩니다.

매일 깨어 주님을 기다리고 바라면서 새롭게 노력하며 살지 않으면

우리의 정주는 무기력한 안주의 늪으로 변해 버립니다.

 

 

 

며칠 전 수녀원에서

어느 수녀님에게 고백성사 보속 준 내용이 생생합니다.

 

“오늘 주님의 변모 축일입니다.

  보속은 오늘 하루 종일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늘 하느님을 그리워할 때 저절로 주님께 믿음을 두게 되고,

하늘에 사랑 보물을 쌓게 되고, 깨어 주님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부르시어 영광스럽게 해주십니다.

하여 늘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가 그렇게 좋습니다.

영성생활도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하느님 사랑, 믿음, 희망, 많이 말해도

하느님과의 구체적 친교의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지 않으면

다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날이며 날마다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 영원토록 찬양하리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미사와 성무일도 기도로 함께 하느님을 찬양할 때

우리의 믿음도 사랑도 희망도 끊임없이 성장, 성숙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다 당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믿음과 사랑, 희망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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