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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최후심판>
작성자이강복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2 조회수369 추천수2 반대(0) 신고
 

최후심판 장면에 대한 해설입니다. 꼭 한 번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최후심판 장면은 성경 전체의 절정, 백미라고들 말합니다.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

  31절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절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절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절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절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절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절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절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절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절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절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절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절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절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절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절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25,31-46 사람의 아들이 내리는 심판

최후심판에 대한 이 인상적인 묘사는 앞에 나온 세 비유의 결론입니다. 그 세 비유에서는, 이 대목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집단이 나옵니다. 그 두 집단을 예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시리라는 사실 앞에서 서로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그 비유들에서는 깨어 있으라고 거듭 권고하면서 최후심판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24,47-51; 25,10.12.21.23.30). 그러나 이제 그 심판이 직접 나옵니다. 이 일화는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께서 수행하시는 공적 임무에 대한 설명이 이 일화로 끝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화에는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자기 공동체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마태오의 시각에서, 마지막 때에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일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행위일 것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취한 태도의 결과가 그때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밀과 가라지(마태 13,24-30,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13,47-50), 충실한 종과 악한 종(마태 24,45-51)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드러날 것입니다. 이 일화에서 가장 놀랍고도 호소력 있는 것은 최후심판에서 사용하는 저울입니다. 최후심판에서 결정적인 판결기준은 극심하게 궁핍한 상황에 처한 예수님의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형제자매들(밥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 물이 없어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외국인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오늘날에도 날마다 굶주림과 영양결핍으로 죽어가는 10만∼15만 명의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는가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최종 이유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자매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형제자매가 굶주림과 영양결핍으로 날마다 수없이 죽어가면, 바로 그 형제자매 안에서 그 형제자매로 예수께서 거듭거듭 죽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그 형제자매를 죽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 때에 어김없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셈입니다.

이 장면은 두 가지 모양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해석은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낱말을 어떻게 알아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로 알아들을 때, 그 낱말은 ‘사람이면 누구나’를 가리킵니다. 그럴 경우, 그 낱말은 ‘모든 사람’을 가리킬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예수님을 모시듯 모시고 섬겨야 할 귀하디귀한 ‘예수님의 형제자매’, ‘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형제자매(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굶주리는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따돌림 당하는 사람들,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람들 안에 예수께서 현존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로 예수께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좁은 의미로 알아들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 ‘형제자매’라는 낱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병든 사람들, 등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특히 그런 사람들을 따듯하게 감싸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 사람들이 교회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고, 결국 사회가 하느님의 나라로 변해가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 변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후심판 본문에 대한 이상 두 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불러 모은 새로운 가정 안에서 흘러넘쳐야 하는 상호연대를 거듭 창조해내라고 자기 공동체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부터 그런 사랑의 모범을 보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앞에 나온 비유들의 조심해서 깨어 있으라는 권고가 이 최후심판 장면에서 커다란 힘을 받습니다. 그렇게 깨어 준비하고 있는 상태는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들을 예수님을 모시듯 모시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그렇게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지 않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전 마지막 때인 바로 오늘, 지금, 궁핍한 사람들, 따돌림 당하는 사람들,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을 눈 앞에 두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바로 각 사람의 운명, 바로 나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는 엄숙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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