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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성모 승천 대축일 2010년 8월 15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3 조회수555 추천수3 반대(0) 신고

성모 승천 대축일  2010년 8월 15일.


루가 1, 39-56.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종말에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믿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승천이라는 단어는 우주가 하늘, 땅, 지옥의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상상하던 시대에 사용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우주관은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님이 그 생애의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믿음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에 발생하여 전설로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믿음에서 발생한 전설이었습니다.


신약성서가 성모님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를 복음에서 들었습니다. 성모님의 축일이면 우리가 자주 듣는 복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역사적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믿던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들도 예수님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브리엘천사가 예수의 탄생을 알리자 마리아는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자, 그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고 믿던 초기 신앙인들은 요한이 예수의 탄생 소식을 그 어머니의 태중에서 듣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이 만나는 장면에는 기쁨과 축복과 찬양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쁨이고, 축복이었다고 초기 신앙인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집회에서 부르던 것입니다. 그 노래는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빌려서 만들어졌습니다. 루가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그것을 채집하여 마리아의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자비하신 하느님 안에서는 그들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분 안에는 인간의 우월감, 권세, 독선 등이 인간 차별의 구실로 남아 있지 못한다는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복음서에서 성모님을 언급할 때, 그 목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하느님을 가르치고,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리는 데에 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복음서의 언급들 중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예수가 정신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이 놀라서 그를 찾아 나선 이야기입니다(마르 3,21-35). 예수님은 실제로 당신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놀라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믿음은 그분을 평범하게 살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 어머니가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으리라는 사실도 우리는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마리아에 대해 복음서들이 하는 이야기는 성모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아들의 운명에 깊이 참여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마리아를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고하는 천사의 말을 듣고,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2,38)고 말하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신앙인의 본보기입니다.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에게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암시하는 마리아(요한 2,1-12)는 술이 떨어진 잔치와 같이 따분한 유대교를 보고, 예수님에게 희망을 두는 신앙인의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당신의 모친 마리아를 당신의 제자와 모자(母子) 관계를 맺어준 이야기(요한 19,25-27)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신앙인들은 그분의 제자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예수님과의 유대를 지속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성모님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는 신앙인의 처신을 알린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축일은 마리아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신앙인의 모범인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하느님 안에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축일이 제정 공포된 것은 1950년 11월 1일입니다. 1945년에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5년이 지났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처참한 폐허가 곳곳에 아직 늘려 있는 시기입니다. 20세기에 일어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많은 생명이 무참하게 살상되고, 도시들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죽이고 파괴하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모두가 실감하였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인들끼리 서로 죽이며, 삶의 터전을 초토(焦土)화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선포되는 땅에서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파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독일인들이 600만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최대로 훼손되었고, 인류의 미래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절망의 현장에서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말해야 했습니다. 인간은 미워하고, 파괴하고, 죽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기에, 인간은 자기의 존엄성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을 제정 공포한 것은 우리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 안에 있으니, 그 존엄성을 자각하며 살자고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많은 한국인이 징병 혹은 징용으로 타향에 끌려가 죽었습니다. 정신대의 비극도 있었습니다. 남과 북의 분단은 수백만의 인구가 이산(離散)가족이 되어 아픔을 안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이오 전쟁은 이 땅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천안함 사건, 상대를 죽이지 못해 으르렁거리는 여(與)와 야(野)의 정치 현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국회의원들의 육탄전 등, 우리의 고귀한 자유는 쉽게도 증오와 폭력으로 치닫습니다. 


오늘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비를 잊은 우리의 말, 무자비한 우리의 몸짓은 구원을 외면하고 파멸로 치닫는 인간이 하는 선택입니다. 자비는 미움을 배설(排泄)하지 않고, 생명을 위해 배려하고 사랑합니다. 그 자비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며 우리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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