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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25 조회수663 추천수5 반대(0) 신고
생물체의 육체를 치료하는 것이 의료(medication)이고, 오염된 의식을 정화(淨化)하는 것을 명상(meditation)이라고 한다.
인도의 영적 스승이었던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Paramahansa Yogananda)가 말했다.
“정신적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에는 애써 잠을 자려고 해보십시오.
그렇게 잠을 자고 난 후 깨어났을 때에는 정신적인 긴장이 풀리고 걱정도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잠의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몸과 함께 있던 영혼이 일시적으로 고통을 없애 줍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깊은 명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 있는 초의식(超意識)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죽더라도 지구는 궤도에 따라 계속 돌 것이며 일은 평상시와 다름 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내가 왜 걱정하지?’하고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인철환 교수는 <명상(瞑想)과 의식의 정화(淨化)>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는 아리랑 노래 구절과 같이 우리의 삶에는 말도 많고, 크고 작은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람은 모태에서 태어나 천진난만한 어린이로 자라는 동안, 다른 포유류와 달리 가장 긴 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인으로 성숙해 간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독립심을 길러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 ‘나’라는 관념을 넣어주고 있지만 이를 지나치게 내세우다 보면 자아(自我, ego)는 강해지고 나이를 먹을수록 정신적으로 불안정(ill being)하게 된다. 이 불안정성을 산크리스트어로 두카(dukkha)라 하는데, 이것이 즉 고통 또는 고뇌이다. 인간이 참되고 보람되게 살아 가려면, 이 불안정성을 안녕(well being)으로 돌려야만 편안하고 기쁨에 찬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을 무슨 고차원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게 아니라 근대사회의 스트레스에서 인류의 심신 상태를 보호하고, 그 불균형의 상태의 균형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의 심리적인 행(行)으로 명상이 있는 것이다. 요가라든가 기공(氣功), 불교의 선(禪)은 조식(調息, 숨 가다듬기), 조신(調身, 몸 가다듬기), 조심(조심, 마음 가다듬기)이라 하듯이 마음을 가라 앉히는 일종의 자기 제어 방법이다. 과학적으로 볼 때 명상을 하면 뇌파가 알파파를 증가시켜 편안한 마음의 정신, 생리학적 상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의 육체에서 자유롭게 되는 작용도 있다. 이는 고도(高度)의 정신상태라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육체에서 정신이 해방되어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의 의식이 우주와 동조하여, 명상을 통하여 ‘Coming Home’의 우주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느끼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의 의식이 우주와 하나가 되어 에고가 없는 순진무구한 최고의 단계의 의식상태가 되어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명상은 자기 성찰(省察)의 시간으로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나’라는 자아가 죽고 진정한 자기가 살아 숨 쉬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아집(我執)의 벽을 깨는 것이다.
집착의 벽, 자신에게만 갇혀 있는 견고한 성(城)을 부수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모든 가치 판단을 철저히 무화(無化) 시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했다. “세상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가난 하지 않다는 것은 뭐든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탐하면서 가난으로 빠져든다. 또 그러면서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의 것은 나의 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명상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모욕을 당할 때, 화가 나거나 하면 영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성숙된 상태이다.
내 안에서 육(Caro)과 영(靈)을 구분하지 않으면, 즉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육의 영향을 받고 육의 노예가 된다. 그러면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다.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 나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善)은 하느님의 것인데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을 훔치는 죄를 범한다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엊그제 아내가 아끼던 분이 세상을 떠나자 나도 우울했지만 아내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참으로 ‘잘 사셨던 분’이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는데 왜 우울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말이 통하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 있는 분이었기에 더욱더 애석하고 그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랍비 루이스 빈스탁(Rabbi Louis Binstock)의 <The Road to Successful Living>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역사상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공에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반 세기 동안 굳어온 물질적인 성공 즉 명예와 돈과 지위와 권력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배워왔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뛰고, 경쟁자를 밟고 일어서고, 가장 슬픈 것은 심지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밟고 일어서서 정상에 오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상에 서고 나면 자신이 너무나 외롭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바로 재물이란 우상을 섬기고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비를 베풀고 살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하늘나라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산 결과이다. 
 
요가난다가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전체 내지 중심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단지 다른 삶으로의 전이(轉移)이며 형태의 변화로서 우주의 중심을 향하여 한 인간이 이동해가는 경험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면 기쁘고 평화롭게 되며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돌아가신 분은 비록 불교신자였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으신 분 같았다.
죽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므로 죽음은 시작일 뿐이다.
 
가볍게 행동하여 하느님의 은총인 복(福)을 털어버리지는 않았는지,
화를 잘 내어 복을 발로 차버리지는 않았는지
,
악한 말을 하여 복을 잘라버리지는 않았는지
,
악한 행동을 하여 복을 뿌리째 뽑아 내지는 않았는지
,
자신을 속여서 복을 썩게 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관대하게 이해하고 넉넉하게 용서하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 아니었는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기 전(前)의 죄업(罪業)은 습성(習性)으로 나타나 대대손손(代代孫孫) 이어지기 때문이다.
 
눈을 감지 못하고 죽지는 말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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