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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 8.2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25 조회수512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8.25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테살3,6-10.16-18 마태23,27-32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요즘 ‘나는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가

많은 화제가 되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날의 시대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탐욕에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때로는 이성을 잃은 분노의 눈빛에서

언뜻 스쳐가는 악마의 모습을 봅니다.

사람이 악마란 이야기가 아니라

악마에 유혹됐을 때 망가지는 사람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기도 후반부 중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청원이

간절할 수뿐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는

지금도 역시 집요하게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돈으로, 지위로, 권력으로, 질투심으로, 열등감으로, 상처로,

나쁜 기억으로, 허영과 교만으로, 분노로 호시탐탐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느님은 이들을 치유하여 우리를 살리시지만

악마는 이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이래서 영적스승들은

우리의 삶은 ‘자기와의 싸움’이라 일컬으며,

이런 영적전투에서

내 안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충고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환경을 만든다 하나

시스템의 환경에서 자유롭기는 참 힘듭니다.

그 좋았던 사람도 돈 맛이나 권력의 맛에 빠지면

변질되는 경우 비일비재합니다.

하여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고 많은 이들은 개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탄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원래 이렇게 안과 밖이 다른 위선자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리가, 권력이, 재력이, 지식이 그들을 오만하게 하여

자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자리와 권력, 지식에 망가진 모습들은 어찌 보면 악마의 희생물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이렇게 잘못된 시스템에 빠지면 시스템에서 자유롭기는 참 힘듭니다.

위선자의 삶을 살 수 뿐이 없게 하는 것, 바로 이게 사탄의 시스템입니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

바로 예수님은 이들의 모습에서 광야에서 자기를 유혹했던,

베드로를 통해 자기를 유혹했던 악마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충격요법의 표현은

사탄의 시스템에서 나오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이들

소유의 사탄 시스템에서 벗어난 이들입니다.

인위의 가면을 쓰고 살 수 뿐이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과연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지도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예전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의 말씀이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은 겉옷보다는 속옷이 깨끗해야 하고,

  속옷보다는 몸이 깨끗해야 하고,

  몸보다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말 그대로 진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비단 종교인이 아니라 해도

어느 분야에서든 대가의 경지에 이른 분들의 특징은

‘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진실은 대가들의 우선적 자질입니다.

진실은 좋고 힘이 있고 아름다우며 감동을 줍니다.

 

아무도 세상 시스템을 벗어나 혼자 고고히 살 수 없습니다.

사탄의 세상 시스템 속에서도

누룩처럼 하늘나라의 진실과 겸손을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습니다.

이래야 사탄의 시스템은 서서히 하느님의 시스템으로 변모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늘 연결되어 살 때 진실과 겸손의 삶입니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 란 말이 성립된다면

반대의 말도 그대로 성립됩니다.

“나는 천사를 보았다.”

“나는 예수님을 보았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사실 사탄의 시스템 안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하느님처럼 살아가는 의인들은

세상 곳곳에 많습니다.

이들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이 유보되고 세상이 유지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정의한 다음 말마디도 참 고무적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하느님을 자신의 온 몸으로 살아낸 분이요,

  또 하느님이 그분을 통해 자신의 거룩한 사랑을 계시한 분이시다.”

사탄의 시스템 안에서

하느님을 온 몸으로 살아 낸 예수님이요 성인들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진실하게 하느님을 온 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

구체적 삶의 지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하였습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 했습니다.

무질서와 게으름의 빈틈을 파고드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이런 기도와 노동이

질서 잡힌 부지런하고 진실한 삶의 시스템이라면

악마의 유혹이 스며들 빈틈이 없습니다.

하여 수도원의 일과표가 그리도 고맙고

일과표에 따른 규칙적 생활을 강조하게 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노동 윤리의 황금률입니다.

불교 종정 해인사 방장 법전 큰 스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밥값을 했는가, 하고자 하는 일을 죽을 각오로 했는가?

  바보처럼 꾸준히 가라.

  그래야 자신도 살리고 세상도 살릴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어디서든 이런 구도자적 삶에 충실하다면

이런 이들은 말 그대로 세상의 빛이자 희망입니다.

이들을 보고 많은 이들은 말할 것입니다.

‘나는 천사를 보았다.’

'나는 예수님을 보았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우리는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라사이들을 통해 악마를 보지만

사도 바오로 일행의 삶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이 그대로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너는 네 손으로 벌어먹으리니,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시편128,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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