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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29일 야곱의 우물-루카14,1. 7-1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29 조회수404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7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에게 주소서.

독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과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손님 초대라는 주제를 가지고 두 가지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다.
먼저 초대를 받았을 때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가르침은 잠언에도 나오는데 (25, 6 – 7) 단순히 사회적 처세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가 그 자리를 비워주게 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며 자신이 가서 앉은 자리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인정받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스스로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멀리하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시는 예수님보다 (루카 14, 2 – 6) 자신들이 더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며, 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1절) 바리사이들에게는 분명 열성이 있었습니다. 회심 이전의 바오로가 그랬듯, 그들은 나름대로 힘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자부심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어 하느님의 뜻보다도 내 뜻이 더 위에 있게 될 때, 그 열성은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을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그 가난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13 – 14절) 저는 초대받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합니다. 오늘은 제 마음 가는 대로 씁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로 초대하는 사람의 처지가 아니라 초대받는 사람의 처지라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해주었을 때, 내가 그것을 갚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갚아줄 것입니다. 그러고는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해준 것이 내가 갚을 수 없는 것일 때, 그것은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살에 닿도록 느끼는 것은 아마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경우,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마음이 죽을 때까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고, 베풀어준 사람들은 저한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제가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 받은 선의에 대해 한번 되갚고 끝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며 저의 삶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선을 베풀었을 때 그 선은 베푼 사람에게 되돌아가지는 않지만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진다고 믿습니다. 그 선이 저를 변화시켜, 다시 선을 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루카 7, 22)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도 이 복음에 나오는 집주인처럼,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음을, 하느님께 갚아드릴 것이 없음을 아는 가난한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하느님께 보답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지만 뼛속 깊이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면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은 가장 복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초대하신 이들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 이었고 예수님께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에는 구원의 선물에 대한 감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찰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이 따라 나올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감사할 줄 아는가 하는 것은 내가 그분 앞에서 얼마나 가난하고 겸손한가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깊은 감사는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 없이, 진실된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도
춤추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과 비파로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으로 꾸미신다. (시편 149, 3 – 4)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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