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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생이라는 시험 -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2 조회수746 추천수13 반대(0) 신고

인생이라는 시험

 

                                             

    멕시코시티에 있는 과달루뻬 대학에서 6주 동안 스페인어 초급 과정을 마치고 처음 승급 시험을 치렀습니다. 로마에서 학위 심사를 마치고 동료들이 소감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던 게 생각납니다. “특별한 소감은 없고 앞으로 학업에 관련된 시험은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하지만 저는 첫날 ‘스페인어 독해’ 시험을 치르는 때부터 줄곧 그때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면서 기막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시험지에 머리를 처박고 낑낑대는 제가 한심하게까지 느껴졌으니까요. 인생 자체가 시험의 연속인데 어디로 어떻게 비켜 갈 수 있느냐고요? 아니, 인생이라는 시험을 비켜 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마흔이 훌쩍 넘은 이때에 적어도 학과 시험 정도는 비켜 가도 되지 않나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사실 저는 시험 치는 것을 그리 힘들어하는 편이 아닙니다. 저처럼 시험 스트레스 없이 사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신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부터 저는 시험에 관한 원칙을 몇 가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중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시험 당일 해가 뜬 뒤로는 책을 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소보다 더 느긋하게 커피도 마시고 조간신문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시험장에 갈 때가 되면 언제나 펜 한 자루만 들고 가서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연신 침을 발라가며 이리저리 부산하게 책을 넘기고 있는 다른 신학생들의 눈에는, 펜 하나 달랑 들고 와서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제가 기이하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시험 치르기 하루 전까지만 열심히 준비하자는 원칙을 꾸준히 지켰습니다. 시험 당일까지 부산을 떨며 초조하게 앉아 있으면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제가 시험이라는 놈에게 기가 눌렸다는 느낌이 들어 싫었습니다.

 

    또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모르는 것은 기꺼이 빈칸으로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답안지를 채우지 못해서 빈칸으로 제출해야 할 때 드는 그 찝찝한 기분은 누구나 경험했을 법합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에 얼렁뚱땅 몇 마디라도 적어서 제출하는데, 그것은 출제자가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단답형이나 사지선답형 문제라면 모를까, ‘신의 존재 증명’과 같이 결론에 해당하는 명제를 미리 정해 놓고 논리적으로 펼쳐나가야 하는 논증 방식의 시험은, 시험 문제를 받는 순간 이미 본인이 이를 돌파할 수 있는지 없는지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해진 시험 시간 동안 자기가 모르는 문제에 집착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문제에 정성을 들이는 편이 여러모로 유익합니다.

 

    설령 모르는 문제가 출제되었다면 과감하게 빈칸으로 남긴 채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이 좋습니다. 빈칸을 통해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비롯한 그 밖의 여러 가지를 배우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스페인어 시험은 지금까지 제가 치른 시험 중에서 가장 편하게 치른 시험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번 시험을 치르면서 얻은 깨달음이 큽니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서 제가 몇 번째인지 따지는 것도, 몇 점 이상을 취득해야 상급 과정으로 승급할 수 있다는 당락의 문제도 제게 아무런 의미를 던져 주지 못했습니다.

 

    해당 대학에서 자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순수하게 제 스페인어 실력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확인해 보는 기회로 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경쟁자가 없으니 경쟁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당락에도 관심이 없으니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제 실력을 과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는 것은 아는 것,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확실히 모르는 문제는 어설프게 빈칸을 메워 요행수를 바라는 것보다 그냥 빈칸으로 비워 두고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이런저런 것을 배웠습니다. 사실 답안지의 빈칸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 인생을 시험의 연속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저는 ‘인생이라는 시험’도 이번 스페인어 시험과 같이 치러 내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인생이 나 외의 수많은 경쟁자를 상대로 벌이는 ‘죽거나 죽이는’ 식의 경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외부 조건에 의해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름하는 당락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연속되는 시험을 통해 ‘내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지?’, ‘나는 어디로 그리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등을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시험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를 비켜 가지 않고 오히려 그 시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해 스스로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길을 끊임없이 찾아 나설 수 있다면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평화로워집니다.

- 성서와 함께 9월호에서

                   ▒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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