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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십자가는 누가 지워준 것인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4 조회수644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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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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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오늘 복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를 덜 사랑하라”고 번역해야 한다. 오역(誤譯)은 반역(反逆)이다. 제대로 해석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배신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제대로 번역된 복음도 변질시키는 수가 많다. 2010년 9월 2일 선종하신 개신교의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는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 앞에서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됩니까? ‘나는 아니오’라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됩니까?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입만 살아서 회개한 한국교회의 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사제(師弟)간의 관계가 부모자식간의 관계보다 더 돈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간의 관계가 부모 자식간의 관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걸을 때 한 쪽 발에 온 몸을 싣지 않으면 걷지 못하고 넘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잘 모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을 때 한 쪽 발에 온 몸을 싣고 걷듯이 제자의 길을 그렇게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양다리를 걸치면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하고 말씀하셨다.(루카9:59-60)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집에 머무르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그는 미래를 미리 걱정하면서 제자의 길을 미루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지 “쟁기를 잡고 되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실 권리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 때문에 무너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원하시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지워주었다.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다.”(마태오 23:4) 우리 인생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처럼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원해서 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미 예언된 것이었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굳건한 믿음을 갖기까지에는 많은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인생을 알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험난한 제자의 길을 갔다. 바오로 사도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 코린토 1:22-23). 그리스도교는 악순환(惡循環)의 비극의 종교이다.
세상 일을 거꾸로 살라고 이르고 있으며 죽어야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한 후에야 선순환(善循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옥한흠 목사님도 ‘제자훈련’교인 하나 하나를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교인들을 교인으로만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일깨워 제자를 만들어 자신이 선 자리에서 어떤 환경이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며 교인들을 제자화하는 훈련을 하기 시작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을 통하여
일요(日曜) 신자로는 결코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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