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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뒤돌아보지 않을 길을 택하라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5 조회수823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3 주일 - 뒤돌아보지 않을 길을 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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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도로를 따라서 차를 운전해가다보면 미관만 해치는 흉측하게 되어버린 짓다가 중도에 포기한 호텔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도 도시 중심에 이런 것이 하나 덩그러니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도시 중심에 높은 빌딩들이 보이고 그 중앙에 특별히 삼각형 모양의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실상 가까이 가서 그 건축물을 보면 짓다가 중도에 포기한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새로운 현대식 주거지를 그 곳에 만든다고 하여 건축을 시작했는데,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상점들이 들어설 대형 상권이 필요 없게 되었고, 그래서 거기에 투자한 사람들은 다 쪽박을 차게 되었습니다.

나라도 골치 아프게 된 것이 거의 완성이 되어가던 건물이었기에 다시 허무는 것도 쉽지 않아 그냥 도시 중심에 그런 큰 건물을 방치해두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큰일일수록 그것을 끝까지 마칠 수 있는지 신중히 생각하고 시작하여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멕시코시티의 그 건축물처럼 뒤처리만 힘들어지는 상황만 남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건축을 시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결혼하고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성소를 결정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직장이나 학교는 바꿀 수 있어도 성소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도, 사제나 수도성소를 시작하였다가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었다가 결혼하여도 마찬가지고, 결혼하였다가 이혼하여도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눈총 받는 실패자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갈 수 없거든 아예 포기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산을 해 보아서 끝까지 망대를 다 완성할 것 같으면 자신을 따르고, 혹은 전쟁에서 이길 것 같으면 자신을 따르고 그렇지 못하면 평범한 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충고하고 계십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차라리 처음부터 도전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신학교에는 일류대 들어가서 좋은 신앙인으로서 잘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사람들도 많이 들어오는데 이들 중에 중도에 포기하여 지금은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열정만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서 끝까지 갈 수 있을 때라야만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도전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큰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만이 아니라 인생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모든 것이 이와 같습니다. 아이 때에는 부모의 말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이 없지만 어른이 된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해 나가야하고 책임도 자신이 져야합니다. ‘결혼해서 싫으면 이혼하면 되지 뭐!’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낳게 될 자녀는 물론이요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 큰 상처가 남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자신이 짓기 시작한 것을 끝까지 짓고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즉, ‘당신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매일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 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 중 가장 크고 힘든 것이 바로 ‘애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나 처자나 형제,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사실 사제나 수녀가 되면 돈을 포기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포기해도 먹고 살 걱정도 없고 벌어 먹일 식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정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성소를 중도에 포기하게 됩니다.

저도 그래서 성소에 대한 고민을 할 때 수학적으로 따져보았습니다. 제가 가장 포기하기 힘들었던 것은 여자를 사랑하는 행복이었습니다. 항상 이것 때문에 성소에 대한 꿈도 못 꾸었었는데 한 번은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이가 25살이고 지금까지 내가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은 2명, 그렇다면 10년에 한 명씩 좋아지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뜻인데 ... 한 다섯 번만 참으면 여자 없이도 지낼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에야 신학교 들어가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자가 좋아져서 성소가 흔들린 적은 없었고, 교만일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작년만 해도 사제가 되고서 여자 때문에 옷을 벗어야 했던 분들이 여럿 있었고 그 분들의 가족은 물론이요 신자들까지도 마음을 많이 아파했습니다. 신학생들은 더 합니다. 특히 고등학교를 바로 졸업하고 들어온 경우, 뒤늦게야 눈을 뜨게 된 신학생들은 한 두 번씩 이런 고비를 넘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 그런 이유로 사제의 길을 중도에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자 문제만이 아니라 가족 문제로 옷을 벗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갑자기 가정 형편이 안 좋아지자 자기라도 돈을 벌어 가정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신학생이 나가는 것을 보았고 사제도 옷을 벗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은 정말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기로 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이 아닌 가정이나 사람이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내 안에서 경쟁을 하게 될 무엇이 생기면 그것은 당연히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시라 둘째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 자신까지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제의 존경받는 삶이 좋아서, 또 어떤 이들은 음악을 하고 싶어서, 어떤 사람들은 - 제가 제일 싫어하는 - 공부를 하고 싶어서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음악이나 연극을 더 잘 해보겠다고 중도에 성소를 포기합니다. 또 어떤 신학생들은 유학가고 싶었는데 반대당하면 옷을 벗고라도 유학을 갑니다. 실제로 유학가기 위해서, 음악을 하기 위해서, 의학 같은 특별한 공부를 위해서 옷을 벗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뜻은 하느님 앞에서 ‘나’로 시작되는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편하고 예쁜 꽃길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가신 가시밭길을 함께 가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도 힘든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 가야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앞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과 희생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은, 공부가 힘들어서, 대인관계가 힘들어서, 순종하는 것이 힘들어서 등 많은 이유를 대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처음부터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결혼하는 것이 과연 행복만을 보장해줍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힘든 삶 안에서 서로 더 사랑하게 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힘든 삶을 함께 지나지 않으면 두 사람과의 사이도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픔만큼 성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들을 낳기 위해서 부부관계를 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부부가 자녀를 위해 힘든 시간을 함께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야 하는 것은 나를 낫기 위해서 배가 아팠고 나를 키우기 위해 고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면 그만큼 고통도 따라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결혼이 환상적인 행복만 기다린다고 생각하였다면, 배우자에 대한 애정이 식고 또 어려움이 닥칠 때 이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무엇을 시작하도록 묶어주셨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좋은 결말을 내야지 헤어질 생각부터 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낳으면 그만큼 고통을 받아야하고 돈도 많이 들어가지만 첫째 애를 낳고 둘째도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보다 조금 고생스럽지만 둘, 셋씩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나이가 들어서 자신들이 한 고생들이 보람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고생해 키운 자녀들이 또 자녀들을 낳아 많은 가족들이 함께 모인 것을 볼 때 부모가 한 고생은 일순간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사람의 자녀를 낳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을 합니다. 저는 사제성소와 결혼성소가 똑 같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제가 가는 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한 아버지로서 물고기만 잡았다면 한 가장으로 남았겠지만 지금의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일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물고기와 사람 영혼의 차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더 가치 있는 삶을 원하신다면 성소의 길을 선택하기를 추천하고 그러나 그 이전에 미리 잘 계산하고 도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결혼도 하나의 성소이고 두 성장한 어른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함께 시작했다면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시작한 것을 끝마치는 것만을 생각하며 살도록 합시다.

 

 

                                     

                                                   < 너 나를 사랑하느냐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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