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 9.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5 조회수493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5 연중 제23주일

지혜9,13-18 필레9ㄴ-10.12-17 루카14,25-33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제 인생 제 어깨에 지고, 

끝까지 살아가는 모습이 참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순교적 삶이요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세상 곳곳에 이런 이들이 있어 참 위로와 힘이 됩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살아갈수록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지기 쉬운 십자가의 짐입니다.

생각, 마음, 육신을 추스르기도 쉽지 않아

내 존재 자체가 짐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지혜서의 이 말씀,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공감하는 실존적 체험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사되는 하느님의 영과 지혜의 도움이 있어

이런 우리의 생각과 마음, 육신을 잘 추슬러갈 수 있습니다.

다음 지혜서의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우리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주님의 선물인 영과 지혜가

우리를 숙명론에서 벗어나 희망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당신의 지혜와 영으로

올바른 삶의 길을, 삶의 패턴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문득 얼마 전 지하철에서 읽은 글귀도 생각납니다.

 

“얼굴이 예뻐서 미인이 아니라 얼굴의 선이 좋아야 미인이다.”

 

성형의 장점을 홍보한 글귀이지만

우리 삶과도 그대로 통하는 진리였습니다.

공부 잘하고, 기도 잘하고, 일 잘해서 예쁜 삶이 아니라

삶의 전체적 윤곽의 선이, 삶이 패턴이 좋아야 예쁜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균형과 조화의 생활 패턴이 습관화될 때

형성되는 예쁜 삶이요,

이런 예쁜 삶의 패턴 따라 얼굴의 선도, 윤곽도 예쁘게 변할 것입니다.

바로 성인성녀들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거룩한 삶의 선이, 패턴이 그대로 몸에, 얼굴에 들어납니다.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때 예쁜 삶의 패턴입니다.

 

사랑의 주님을 중심으로

흩어져 무너져 내리는 마음이나 육신을 모아 질서 잡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요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때

집착의 사랑에서 벗어나 눈 밝은 분별의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실제 가족을 미워하라는 게 아니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집착의 눈 먼 사랑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친지와 사랑의 인연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인간적 집착의 사랑을

순수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친지에 모두를 거는 맹목적 집착의 사랑은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중심에 주님을 둘 때

모두에 대한 집착 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친지들을 주님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친지들과 이웃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실천이요

그 삶의 선(패턴)도 아름다울 것입니다.

2독서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사도 바오로가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원래의 주인인 필레몬에게 보내는 모습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보내드립니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도 바오로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삶의 선이, 패턴이 참 예쁩니다.

 

 

 

안팎으로 버려갈 수록 예쁜 삶의 패턴입니다.

 

사람은 집착의 동물입니다.

불교 사성제의 진리인 고집멸도 역시 집착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시작되기에

고의 원인인 집착을 없앨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장 어려운 사람의 포기에 이어,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한마디로 삶의 중심에 사람이나 재물을 놓지 말고

주님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이 아닌

사람이나 돈을 놓고 집착했다가

낭패 보는 어리석은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억지로 포기가 아니라 주님 사랑의 열매가 포기입니다.

참 보물 주님을 발견했을 때 저절로 자발적 포기의 가난입니다.

 

그러나 포기의 정도는 다 달라 강요하거나 획일화 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깊이와 깨달음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정도 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역시 분별의 지혜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망대의 비유나 전쟁에 임한 임금의 비유가

이런 분별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제 정도에 맞게 사랑하고,

제 정도에 맞게 포기하고,

제 정도에 맞게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가을이 되어야 익어 떨어지는 열매이듯,

사랑의 성장과 더불어 철이 날 때 익어 떨어지는 포기의 열매들입니다.

억지로 가정과의 인연을 정리하지 않아도,

억지로 재물을 포기하지 않아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깨달음이 깊어지면서

때가 되면 점차 자연스런 정리도, 포기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때 완성되는 예쁜 삶의 패턴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모든 것의 포기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바로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이 자기 버림이요

자기 버림의 자유는 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완성입니다.

자기 버림의 자유만 누린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는 책임적 존재로서의 순교적 삶 없이는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과연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잘 지고 가고 있습니까?

누가 대신 저 줄 수도,

내려놓을 수도,

누구와 비교할 수도 없는 내 책임의 십자가,

내 운명의 십자가,

내 약하고 부족한 존재로서의 십자가입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십자가의 짐을 부여하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과 힘을, 지혜를 주시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하십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첫 주에 잘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이래야 집착에서 벗어나 눈 밝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단히 안팎으로 버리십시오.

이래야 자유로이 사랑에 투신하며 주님을 잘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십시오.

이 길 빼고는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이렇게 살 때 저절로 형성되는 예쁜 삶의 선이자 패턴입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