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묵상은 주님의 강론 시간이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8 조회수564 추천수6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루카 6:39-42)
.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멀면 아무도 인도할 수가 없다. 그런데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드문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눈먼 사람을 따라 다니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눈이 먼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주님일 뿐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하느님이 다 다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설명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지 하느님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쉽게 들리지 모르나 하느님 가까이에 머물려고 애쓰기만 하면 된다.
몹시 까다로운 성인이든 단순한 성인이든 성인들은 모두 하느님 가까이에 머물려고만 했다. 하느님 가까이에 있기만 하면 된다. 힌두교에서는 ‘묵상’을 ‘satsang(강론)’이라고 부른다. 나무 아래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은 일종의 ‘satsang’이다.
최근에 나무 가까이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나무의 아름다움만 극구 칭찬한다.
나무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나무 가까이에 있으면 침묵하게 된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말했다.
외로이 묵상하고 사는 삶은 소나무 숲 속의 바람도 다 말하지 못한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더라도 그들이 말한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신학(神學) 이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많은 것을 말했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빛이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말뜻을 알아들어야 한다. 행간(行間)을 읽으라는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말할 때가 많다.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거나, 그침 없이 말하거나, 말에 진심이 없으면 그 말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침묵 중에 있으면 진리를 어렴풋이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정확하게 보게 된다.
침묵 중에 신학적인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理性)을 잃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모두 알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이성이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다. 어렴풋하지 않게 정확하게 알아야만 남의 진면목이 보이게 된다. 형제의 눈 속에는 티가 있지만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다.
 
묵상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그러나 생각하자마자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한참 후에 들리게 된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하느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셨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도 하느님의 현존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어렴풋이 보고, 믿기도 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바탕을 두고 살지만 때로는 완전히 모순되거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신다. 그 곳은 우리가 늘 되돌아가야 하는 어머니 품 속 같은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하고 말했다.(에페소 1:17-19)
이 모든 것이 소망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소망은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소망을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
기도는 소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우리가 참으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을 씹고 또 씹으면서 살아야 한다. 이 방법 외에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몇 번씩 읽고 남의 해석을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계속해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씹고 또 씹으면 아마도 몇 십 년이 지나서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다. 교리나 체계적인 사상이나 빈틈 없는 논리도 아니며, 어떤 종교의식이나 조직체도 아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께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이 믿음이 우리가 힘겨운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토머스 머튼이 말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추구한 목적대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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