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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공동체의 신비" - 9.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8 조회수434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8 수요일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미카5,1-4ㄱ 마태1,1-16.18-23

 

 

 

 

"하느님 공동체의 신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지 홀로 고립 단절된 부분은 없습니다.

오늘 동정 마리아 축일 역시 홀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배경이신 하느님께서는

적절한 때, 적절한 역할을 주시어 동정 마리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알게 모르게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오늘은 공동체에 대해 두루 묵상했습니다.

예전에 40대 초반의 어느 신자 교수가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의 투자 우선순위는 내 아내입니다.

  노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지금부터 아내에게 정성껏 투자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당시는 웃고 말았는데 생각할수록 공감이 갑니다.

혼자는 못삽니다.

어느 형태로든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이런 공동체에 사랑의 투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늙지 않고 아프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공동체에 적금 든다.’라는 말이 떠나지 않습니다.

젊고 힘 있을 때,

또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느님의 공동체에

기도와 노동, 사랑으로 투신함으로

공동체에, 하느님께 적금을 들어놔야

유사 시 편안한 마음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가족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랑의 적금을 든 부모들에게

자식들은 결코 그 부모의 노후를 모른 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는 강원도 동강(東江)으로 공동체가 가을 소풍을 앞당겨 다녀왔습니다.

차 안에서 제가 시종일관 유심히 바라본 것은 산 능선들이었습니다.

얼굴 부분이 예뻐서 미인이 아니라

얼굴의 선이, 몸의 선이 좋아야 미인이라는 말이 새로웠는데,

역시 산들의 선이 좋아야 좋은 산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써놓은 글입니다.

 

“늘 하늘에 닿아있는 고요한 산 능선들

  내 영혼 늘 하느님께 닿아있는 산 능선이고 싶다.”

 

외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특히 그리워하는 것은

고국의 부드러운 산 능선들이라 합니다.

따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여도

작고 큰 산들이 모두 산맥으로 연결되어있어 참 부드럽고 유장해 보입니다.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이

모두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지

홀로 떨어져 있는 복음의 예수님 족보가

하느님의 산맥을, 하느님 산 능선들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기기묘묘한 산들이 연속된 산맥이요

산 능선들처럼 예수님의 족보도 그러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 사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 사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 사대이다.’

 

14곱하기 3하면

42개의 사람 봉우리들도 이루어진

하느님의 장구한 산맥 공동체를 연상시킵니다.

산맥을 연상시키는 족보인가 하면

42개 묵주 알 달린 묵주(사실은 없지만) 끈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산맥에서 홀로 떨어진 산이 보잘 것 없어 보이듯이,

묵주 끈에서 떨어져 나간 묵주 알 역시

존재이유의 상실로 아무 쓸모도 없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공동체는 이런 것입니다.

전체 안에서 부분이지

전체의 공동체 맥락을 벗어난 부분으로서의 개인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여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 공동체의 배경이십니다.

하느님께는 성속도, 크고 작음도, 좋고 나쁨도 없고

또 쓸모없다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 소중합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는 이들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미카 예언서가 이를 입증합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모두가 구원 섭리의 역사 안에 그 자리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족보를 보셔요.

온갖 사람들이 다 들어있는 인간 박물관 같습니다.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 보아

결격 사유를 지닌 이들로 가득하며 의로운 이들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너무 다릅니다.

결코 못났다고, 죄인이라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죄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못남과 죄까지도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쓰십니다.

구원 역사가 끊어질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주저 없이 다말, 라합, 룻, 바쎄바를 통해 개입하십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였고,

라합은 소문난 창녀로서 살몬과 관계하였고,

룻은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하였고,

바쎄바는 자기를 범하고 자기 남편을 전사케 한 다윗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렇게 네 여인은 제각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했습니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족보이자 하느님의 족보요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세례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 족보에 편입되었습니다.

인간 눈에 죄인들이지

하느님의 눈에는

당신의 도구 역할에 충실했던 하느님의 거룩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마침내 네 여인에 이은 다섯 째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 불가사의의 극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동정 마리아의 배경이 된 의인 요셉은

주어진 조연 역할에 충실하였고,

마침내 구원역사의 절정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으로 예수님의 족보는 완성됩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구원 섭리 역사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 동정 마리아 덕분에 이사야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동정 마리아 탄생을 경축하며,

동정 마리아를 통해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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