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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의 공평한 심판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9 조회수966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3 주간 목요일 - 하느님의 공평한 심판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었습니다. 군것질 할 가게도 없었고 가끔 찾아오는 뻥튀기 리어카가 밥 아닌 다른 것을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오면 집에 있는 모든 쇠붙이나 병들을 모아다 가져다주었고 그 것 때문에 동네가 깨끗해 질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그 아저씨가 서비스 차원에서 뻥튀기를 거저 준다고 아이들만 다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빈손으로 달려 나갔지만 다른 아이들은 각자 그릇을 준비해 나왔습니다. 한 친구는 세숫대야만한 양동이를 들고 나왔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각자가 들고 나온 것에 가득히 뻥튀기를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양 손을 벌려 최대한 많이 받아보려 했지만 결국 옷으로 받혀서 가장 적은 양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저씨가 불공평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들고 나온 그릇의 크기는 각자가 판단했던 뻥튀기 아저씨의 자상함이었습니다. 그러니 각자는 각자가 그 아저씨를 판단한 만큼 받아가게 된 것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양을 주는 것보다 각자의 기준대로 주는 것이 더 불평이 적고 더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배우자나 부모, 혹은 자녀에게 대하는 것이 직장사람이나 길에서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과 똑같다면 그것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도 사랑 자체이셨지만 성모님과 가리옷 유다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심판의 잣대대로 심판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남을 모질게 심판했으면 모질게 심판받을 것이고 자비로웠다면 우리의 죄도 자비롭게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무자비한 자는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 2,13)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각자를 다르게 심판하실 것이지만 그 심판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잣대에 따라 한 것이니 하느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심판을 피하는 길은 내가 지닌 심판의 잣대를 부러뜨려 못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나를 심판할 잣대가 없기 때문에 나를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심판의 잣대는 나의 교만과 비례합니다. 내가 교만해지면 그만큼 하느님과 같이 높아져 심판자가 되고 상대를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교만하여져서 아담은 하와를, 하와는 유혹자를 심판한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나의 심판의 잣대를 아주 작게 만들거나 부러뜨리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짓기 이전의 겸손한 상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저절로 커진 자신의 잣대로 자동적으로 이웃을 심판하게 되어있습니다.

 

공기 안에는 좋은 냄새도 안 좋은 냄새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에나는 썩은 냄새만 맡고 그 냄새를 쫓습니다. 상어는 바다에 피가 한 방울만 떨어져도 수 킬로 밖에서 그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꿀벌은 꽃을 보지만 똥파리는 똥만 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존재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나쁜 것만 찾아내서 그것을 보고 판단하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본성이 이미 하이에나나 상어, 똥파리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나눌 것이지만 심판 때문에 양과 염소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 25장 참조) 이미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남을 심판 할수록 자신은 염소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남을 미워하지는 맙시다. 남을 용서 못하고 미워한다면 나의 죄 또한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남은 단죄하는 사람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사람은 상대를 심판함으로 심판받는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심판함으로 심판받았고, 사울은 다윗을 심판하여 심판받았으며, 유다와 그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를 심판함으로 심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나를 심판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도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심판하고 있는 사람과 별반 다름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며 모든 심판은 주님께 돌리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과연 내가 지니고 있는 심판의 잣대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짧은 묵상 - 왜 원수까지 사랑해야하나?

요즘 제가 제일 싫어하는 놈들이 모기들입니다. 여행 다닐 때도 많이 물려서 팔뚝에 자국들이 많고, 로마에 돌아와서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물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저를 더 무는 것 같아 매우 싫습니다.

방에 있으면 전자모기향을 켜놓고 있으니 물리지 않는데 밥 먹으러 식당에 내려갈 때나 성당에서 기도할 때 많이 물립니다. 그렇다고 모기가 싫어 밥을 먹지 않거나 기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니, 나의 원수인 모기까지 사랑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모기는 잘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나에게 피해를 주지만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자신의 새끼들을 살리려고 하는 본능에 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에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나를 괴롭히는 것들까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피조물도 그런데 하느님의 모상을 한 인간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어쩌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미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어주고, 겉옷을 빼앗아 가면 속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만 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다 실천하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당신의 가장 큰 원수였던 유다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마음은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경지입니다.

만약 우리도 속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시니, 배반당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또 배반을 당해서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고통을 나도 느낄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되고, 그 분 안에서 더 위안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참 행복은 바로 하늘나라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라하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으로서 당신 행복의 경지를 우리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기 때문에 당신을 따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미워해봐야 나만 손해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 마음 속에 남아있게 하지 맙시다. 그리고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까지 사랑합시다. 그 사람에게 또 배반당하고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유일한 길입니다.

 

 

 

 

<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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