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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의 자비에 질투심이 생긴다면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11 조회수804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4 주일 - 하느님의 자비에 질투심이 생긴다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한 영화 ‘밀양’을 다 아실 것입니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함께 연기를 했는데 역시 전도연의 연기가 두드러졌습니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을 하나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피아노 강사 이신애가 정착하러 오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녀는 혼자 산다는 핸디캡을 극복하려고 그랬는지 돈이 많은 행세를 하고 여기저기 땅도 보러 다닙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유괴범은 그녀의 아들 준을 납치해 살해하고 그녀의 남은 돈을 차지하지만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맙니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아들마저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을 목격한 주인공은 장례식 때 눈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집 약국을 운영하는 개신교 집사의 권고로 치유기도회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한 맺혔던 울음을 토하고 새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간증까지 하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된 주인공은 급기야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교도소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유괴범도 신앙을 갖게 되어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하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다시 울화가 치밉니다. 자신도 용서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그렇게 편안하게 있는 모습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이제 그 사람도 미울뿐더러 그 사람을 용서해 준 하느님을 더 원망하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러 죄를 짓고 개신교 집회하는 곳에 가서 훼방을 놓습니다. 그런 것으로 화가 가시지 않자 그녀는 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간신히 목숨은 건집니다.

 

이는 오늘 세리와 죄인들을 쉽게 용서해주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모습을 본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마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들은 큰 죄도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온갖 안 좋은 짓들을 잔뜩 하며 살아온 그들을 쉽게 용서해주고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서 탕자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되었던 아들이 돌아와 기뻐하고 있는데 형은 동생도 밉고 아버지도 미워 집으로 들어오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아버지를 위해서 일을 했지만 염소 한 마리도 친구들과 먹으라고 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만 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잡으라고 내어주시는 것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비유를 하나 더 들어주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침에 나가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며 일꾼들을 데려옵니다. 아홉시에 나갔더니 여전히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어 데려옵니다. 점심때도, 오후에도, 일이 끝나기 한 시간 전에도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가장 처음에 와 일한 사람들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난 너희에게도 약정한 대로 주었는데, 내가 자비로운 것이 그렇게 불만이냐?”

 

하느님의 자비가 불만인 이유는 본인이 그만큼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자비한 사람들은 밀양의 주인공처럼 언젠가는 한계가 드러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자비로운 하느님을 미워하고 떠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밀양의 주인공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자살은 어쩌면 남들에게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마지막 반항일 수 있습니다. 마치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망치는 자녀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결말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살한 것은 죄책감이 들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하느님께 무릎 꿇기 싫어서 자신의 영혼을 죽여 가면서까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똑똑하고 훌륭했다고 생각했는데 못 배운 어부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게 생각하는 예수님이 미웠고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과 또 하느님과 싸우고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들을 살해한 그 사람을 용서하기 힘든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고 그 주인공에게 연민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구원을 받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던 주인공은 하느님을 떠나고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느냐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봅시다. 만약 주인공이 돈이 많은 척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유괴범이 그 아들을 노렸을까요? 한 평범한 피아노학원의 아들을 노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죽은 것에는 자신의 잘못도 적지 않게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이 유괴하여 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 골목에서 매를 맞고 있는 웅변학원 딸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차를 돌려 지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딸은 미용사가 되어 주인공의 머리를 잘라줍니다. 과거의 일은 다 용서하였다는 듯이 선한 얼굴로 열심히 자르는데 사실 주인공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데 어린 이 아이는 자신을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도 누군가로부터 용서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엔 질투를 합니까?

 

백 마리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넣어놓고 한 마리 양을 찾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골자기가 아무리 험해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낸다면 그 한 마리 때문에 매우 기뻐합니다. 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이 한 마리의 양이 더 소중해서가 아닙니다. 양은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가치가 목자에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은 지체 없이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은 이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세상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은화를 찾는 것 또한 잃어버린 은화가 다른 은화보다 값이 더 나가서가 아니라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은화이고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모으신 것입니다. 누구는 더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데려오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지 다 같은 신세였음을 명심해야 하고 하느님을 찾은 형제들을 보며 함께 기뻐해 주어야합니다.

 

가슴 아픈 것 중의 하나는 밀양의 주인공처럼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자신까지 죽이게 되는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를 네 자로 표현하라고 했더니 “평생 왼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젊었을 때 그렇게 속을 썩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용서하셨는데, 왜 할머니에게는 ‘평생’ 왼수일까요? 겉으로만 함께 살고 있다고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일까요?

고정원씨가 자신의 노모와 아내, 아들까지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들이 아니기에 남의 자비를 질투하고 견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자신을 수십 번이나 난도질한 살인자와 하느님나라에서 같이 살고 싶다고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의 원수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살고 싶어질 때, 비로소 용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가는 우리들이 됩시다.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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