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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16 조회수1,110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카 7:36-50)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Peter Chrysologus, 380 – 450)는 “한 때 죄인이었던 이 여인은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하고 자문(自問)했다. 짧은 강론으로 유명했던 성인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여인은 교회를 가르킵니다.”라고 주저함이 없이 답했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그 여인은 바리사이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나가야했다. 여인은 바리사이들 몰래 잽싸게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한 랍비가 설교하고 있을 때 군중들이 그 여인을 들여보내 설교를 듣게 해주었기 때문에 몰래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군중들의 얼굴과 몸짓에서 경멸을 똑똑히 보았다.
그 여인은 그들과 달리 성인(聖人)인체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이 ‘성인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참회(懺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었다. 바리사이들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도덕적으로만 의롭게 보이고 거룩하지 않으면 평온하게 보이지 않을 뿐더러 평화가 없어 죽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살아있었고 감정도 풍부하고 할 말은 다 했다.
그래서 성인은 그녀를 ‘열정적이며 감정이 풍부하다’고 표현했다.
그녀는 울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랑할 수도 있었다.
또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고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
마치 무정한 현대인들처럼, 바리사이들에게는 감정도 없었던 것이다.
그 여인은 달콤한 술잔이 있는 사랑의 잔치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배신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바리사이들이 교회를 주물렀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과연 선인(善人)들의 교회가 되어 있는가?
 
성인은 강론을 무척 잘하여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 많다.
그 중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제목의 강론은 무척 감동적이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덕행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존하는 사람 안에서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평화는 사람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귀족의 이름을 줍니다.
평화는 또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지니고 있는 위치를 변모시켜 그를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노예 상태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형제들간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리스도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완성이고 정의의 규범입니다.
지식의 스승이고 윤리의 수호자이며 만사의 칭송할 만한 질서입니다.
평화는 기도의 목표이고 쉽고 안전한 청원 방법이며 모든 욕망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평화는 또 사랑의 어머니, 화목의 유대, 그리고 원하는 것은 다 청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평화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청하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습니다.
우리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평화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흡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 가운데 너희와 헤어졌다. 내가 다시 올 때 너희가 평화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보고 싶어하신 그 평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를 보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준 것은 다시 찾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모호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마음속 깊이 평화를 심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은 원수의 짓입니다.
형제적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마귀들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미움을 단죄해야 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평화를 사랑하고 화목을 소중히 여겨야 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평화와 화목은 사랑을 낳고 또 그것을 자라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사랑은 하느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다.”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생명에 이바지하는 계명들을 지킵시다.
깊은 평화의 유대로써 형제들의 공동체를 한데 묶고,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의 구원적 유대로써 공동체를 견고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 마음의 온갖 욕망을 지닌 채 사랑을 포옹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은혜와 상급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평화 가운데 계시므로 평화를 다른 모든 덕행에 앞서 간직해야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십시요. 그러면 모든 것이 평온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상급이고 여러분에게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평화의 일치 위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온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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