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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는 이유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16 조회수890 추천수17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4 주간 금요일 -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는 이유


 

교회 내에서도 여성인권주의자들이 남녀평등을 들어, 다른 종교들처럼 여성 사제가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사도들을 남자들로만 뽑았던 것은 당시 사회구조가 남성 위주이고 여성이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으니 남성 위주의 교회가 현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사실 수녀님들과 미사를 함께하고 있지만 연세 많으신 수녀님들이 저같이 젊은 사제에게 사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굽실굽실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 분들이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원로 신부님들이 되어계실 것인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제가 되지 못하고 같은 봉헌생활을 하면서도 수녀님으로 평생 사셔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 내의 여성사제직이 불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 사도들을 남성으로만 뽑으셨다는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임을 당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와 천상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와의 혼인잔치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그 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도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사제들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이는 내 몸이니... 이는 내 피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또 고해성사 때도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하느님만이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이들은 남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여자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남성은 마치 밭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자신의 것을 주는 역할을 하고 여성은 밭처럼 받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여성으로 태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남성의 역할을 하실 분이시고 교회의 신랑이 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가 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령님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아들은 남자인 아버지 앞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며 성령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교회에 당신의 전부인 성령님을 보내시며 한 몸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서도 우리의 ‘성’ (性)은 그대로 남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성만이 사제가 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성차별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하지만 한 몸을 이루시는 것처럼,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이 두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참으로 남자가 된 때는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 앞에서였습니다. ‘나’라는 말이 ‘너’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또 하느님 아버지가 당신 아들이 계시지 않는다면 아버지라 불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땅이 하늘과 함께여야하는 것처럼, 남자도 여자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자가 씨를 뿌린다고는 하지만 결국 밭이 없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둘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는 누가 먼저 창조되었느냐를 떠나서 서로 결합되어 한 몸이 되어야 완전해진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 혹은 여자의 우월주의를 넘어서서 서로 결합하지 않으면 미완성된 인간으로 남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마음으로나 물질로 도왔던 여인들이 나옵니다.

왜 여자들을 사도로 뽑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남녀차별을 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역할을 서로 다르게 준다는 것이 차별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회사에서 누구는 영업부, 누구는 인사부, 누구는 품질관리부 등으로 사람들을 배치한다고 해서 그것이 차별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각자가 더 잘하는 분야가 있기에 그것을 서로 충실히 함으로써 회사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함입니다. 모두가 다 한 일만 하기를 원한다면 회사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각자의 모습을 존중하지 않고 같은 일만 시키는 것이 차별하는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해 주었다고 해서 그들보다 여성들이 낮은 수준의 일을 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미국의 대통령이고 그 대통령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부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비록 남편의 내조만 해주었다고 해서 남편보다 못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남편의 영광을 함께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녀를 출산했을 때 그 기쁨을 남편, 혹은 아내만 갖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은 자녀를 출산하기 위해 각기 다른 역할을 했지만 결국 자녀를 보면서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누가 더 큰 역할을 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자녀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인간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셔서 서로 사랑 안에서 도우며 하나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더 높으냐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모님이 미사나 고해성사를 평생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 성모님보다 더 크신 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모님은 성사를 집전했던 모든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남편은 ‘내가 돈벌어오는 기계야?’ 또 아내는 ‘내가 뭐 이 집 가정부야?’라는 식으로 자신의 해야 하는 역할에 불만을 지닐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할 때야 둘은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고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사도들을 따라다니며 도왔던 여인들 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사도들에게보다 먼저 보이셨던 것처럼 주님의 눈에는 고귀한일도 허드렛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자와 여자는 존재하는 방식의 차이니 서로의 역할을 넘보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참으로 남자가 되고 여자는 참으로 여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더 합당한 일입니다.

 

얼마 전에 뛰어난 성적을 보였던 한 여자 육상선수의 몸속에 남성의 고환이 들어있는 것이 발견되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몸은 여성이지만 남성 호르몬이 나왔던 것입니다. 여성인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남자와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불쌍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이름이 기억되는 여인들

만약 우리 이름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 기록된다면 매우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일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면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신사임당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될 꿈을 꾸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에겐 교과서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책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늘나라 책에 어떤 사람들 이름이 기록되는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본보기는 당연히 성경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감으로 쓴 것이기에 하느님이 누가 가장 맘에 드는 사람들인지가 성경에 인물들로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어떤 사람들이 기록될까요? 물론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세례자 요한, 열두 사도, 바오로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성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하느님의 뜻을 영웅적으로 따른 사람들이 기록됩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떨까요? 구약에도 유딧이나 에스델 등을 비롯하여 영웅적인 여인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성의 큰 역할에 비하면 크게 두드러지는 편은 아닙니다. 물론 영웅적인 여성들도 남성들의 협력 없이는 그런 큰일들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시대적 상황이 그래서 그런지, 구약에서 가장 기억되는 여성들은 가장 위대한 남성들의 아내들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 야곱의 아내 라헬을 기억합니다. 이 여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위대한 남편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여자로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는 대통령의 영부인이 되는 편이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보인 여인들은 모두 성경에 낫낫이 기록됩니다. 성모님이 그렇고, 마르타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대접하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여인들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위해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바르는 여인들과 골고타와 무덤까지 쫓아 올라간 이들도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이들은 마치 구약의 위대한 인물과 혼인한 것처럼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도와준 리디아와 같은 여인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리하는 사람들이니 기록에 남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사도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준 여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다 기록됩니다.

 

저는 한인 신학원에 살고 있습니다. 한인 신학원에는 밥을 해 주시는 수녀님들이 계십니다. 그 수녀님들은 공부하는 저희 신부들보다 신학을 모릅니다. 어쩌면 사제의 밥과 빨래를 해 준다고 해서 낮아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님들에게서 그런 느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항상 즐겁게 일하십니다. 그 분들은 한 사람인 사제에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을 도와주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선 여인들의 이름은 다 기록했음에도 그들이 시중들던 그리스도의 일행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적어도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보다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가 주인공인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남자들이 하지만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으로 어쩌면 복음전파를 하는 이들의 영광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그리스도를 도와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라고 하여 물 한 모금이라도 준 사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책에는 위대한 마더 데레사와 같은 분들만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협력한 사람들도 복음전파 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하느님께서 크게 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여인들처럼 되기 위한 방법은 본당 신부님의 사목을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한 인간인 사제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업에 그 제자들을 통해 협력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는 일처럼 남자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전파를 돕는다고 하여 아주 작은 일에 협력할지라도 예수님은 그 이름을 당신 마음에서 절대 지우시지 않을 것입니다.

 

  
<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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