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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재물이 재난이 되는 날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26 조회수781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6 주일 - 재물이 재난이 되는 날


 

병원에서 어떤 중년이 되신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귀 수술을 받기 위해 기다리시는 중이었는데 제가 사제인 것을 알고 당신도 천주교 신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당에 나가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하도 몸이 안 좋아 귀, 코 수술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자신만 왜 이리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결혼도 못하고 평생 혼자 살아온 것에 대한 불만도 컸을 것입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미혼이었습니다.

수술을 하러 들어가기 전에 기도라도 하라고 했더니 망설이기에 저도 기도를 해 주겠다고 했더니 기뻐하셨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에 그는 오랜만에 수술 시작하기 전과 끝나기 전에 기도를 하였고 얼굴이 마비될 수도 있는 복잡한 수술이었는데도 다 잘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분께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분을 보면서 거지 라자로를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지 라자로가 천국 들어간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착한 일을 한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거지로 불쌍하게 산 것 밖에는 없습니다.

부자가 지옥 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특별히 무엇을 잘못 해서 지옥에 갔는지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지옥에 가서까지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하기위해 라자로를 다시 부활시켜달라고까지 청하는 어쩌면 착한 사람입니다.

 

라자로와 부자가 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갔는지는 우리가 추측해보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비유말씀을 하시는 대상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즉 돈만 아는 부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재물,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을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라자로는 거지에다 종기투성이였고 개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 되면 구약의 ‘욥’을 떠올려야합니다. 욥은 매우 부자였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그만큼 섬기는 사람이 없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거두시고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라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욥은 발밑에서 머리끝까지 종기가 돋아나서 토기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하느님을 욕하라고 하지만 욥은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라고 대답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라자로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이유 없이 내려진 고통들이라고 하더라도 다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으려니 하며 ‘불평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부자도 원망하지 않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으며 살았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때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병원에서 만난 그 중년분이 하느님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에게 오는 고통이 컸기 때문입니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큰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정말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불평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천국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란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라자로에 대해서 생각 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말씀을 하시며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라자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왜 예수님은 라자로라는 이름을 쓰셨을까요? 그 이유는 라자로와 부자들인 바라사이들을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사이들도 라자로를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타니아에 사는 마르타와 마리아 두 여동생을 둔 큰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부자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로 닦아 준 인물입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300 데나리온, 즉 2,000만 원 정도입니다. 요즘 2,000만 원짜리 향수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것도 아끼지 않고 한 번에 깨어서 써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은 이 세 남매를 매우 사랑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자였음에도 돈을 아끼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돈은 문제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라자로를 살려내어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하지만 그것은 형제들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가타리나 성녀에 의하면, 지옥에 가면 서로 헐뜯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서로 가까웠던 사람끼리 고통을 주게 되는데 자신들이 지옥에 오게 된 이유를 상대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자는 형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그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들은 죽어서 이미 썩은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기적을 보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예언서도 믿지 않으면 그런 기적을 보여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즉, 죽은 라자로가 썩어 냄새가 날 때에 그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활시키십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해주듯이 그들은 죽었다 살아난 이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결국 예수님과 다시 살아난 라자로까지 죽이려듭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로 미래를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지옥에 가게 되었을까요?

부자는 거지 라자로가 자신의 집 앞에 뻔히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음식을 주지 않아 떨어지는 음식만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하느님 것임을 잊고 산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부자로 만들어주셨다면 그 돈을 하느님 뜻에 따라 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끼게 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돈의 주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즉,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은 것 자체가 죄란 뜻입니다.

쉰들러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살립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반지나 시계 등을 팔았다면 몇 명은 더 살렸을 것이라며 크게 후회를 합니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는 우리가 남겨놓고 가는 재산들이 우리의 죄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처럼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우상숭배자, 즉 ‘내가 주님(주인님)!’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라자로를 축복해주기 위해 부자로 만들지 않고 부자를 벌하기 위해 가난하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누가 부자로 사는 것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면 오늘 복음을 다시 읽어보라고 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성모님도 마찬가지고 욥도 거지 라자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하느님보시기에 더 기쁘실 수 있고 사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순종이 세상을 구원한 것입니다. 남편이 또는 시어머니, 자녀들이 왜 저러냐고 한탄하기 보다는 라자로처럼 모든 것에 순응하는 모습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병원에서 만난 그 분에게 자식을 매질하고 나무랄 때 자식이 부모에게 어떠한 감정을 갖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당연히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질 때도 있지만 언젠가 부모가 되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고통들을 지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깨닫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저에게 30년 만에 고해를 하셨습니다. 라자로처럼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불평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결국엔 라자로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가시기를 바랐습니다.

 

 

< 아무 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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