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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포용력과 겸손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26 조회수1,047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26주간 월요일 - 포용력과 겸손


 

‘내 사랑 내 곁에’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슬픈 영화라고 해서 오랜만에 눈시울을 적셔보려니 했는데 이상하게 전혀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거부하는 모습에서 조금 답답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중 인물들의 모습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니 그들의 캐릭터에 동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루게릭으로 죽어가던 남자 주인공이 여자에게 “너는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왜 너는 너만 생각해.”하며 불평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실 여자는 남자가 어차피 죽을 운명이기에 자신을 떼어놓으려 하는 것으로 알고 끝까지 참고 견디려 하였지만 아기까지 지워버리라는 말에 “누가 이기적인지 한 번 잘 생각해봐.”라고 하며 결혼반지를 빼서 던져버리고 남자를 떠나갑니다.

제가 보아도 이기적인 것은 오히려 남자였는데 남자는 조금씩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너무 받아들이기 싫었는지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물론 저도 그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유학을 하면서 속이 더 좁아지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외국 유학을 하면 시야가 넓어진다고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한국에 있을 때는 그냥 웃어넘길 일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힘이 들어서 이기적이 되는 것인지 이기적이어서 힘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만 생각하다보면 상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저는 할머니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오늘 아침도 식사를 하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지나가시다가 제가 먹고 있는 과일 깎아 놓은 것들을 손으로 다 집었다 놓았다하시며 결국 물렁한 복숭아를 하나 드셨습니다. 그것이 맛있었는지 나머지 하나까지 손으로 집으셔서 드시려 하는데 다른 할머니들이 신부님 것을 손으로 다 주물러 놓았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어차피 주물러 놓으신 것을 드시라고 하였는데 다른 할머니들은 그 치매 걸린 할머니를 쫓아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들도 치매 걸린 할머니의 행동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을 꼬치꼬치 따져가며 수긍이 가는 것만 받아들이려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공식적인 제자가 아니라고 하여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말리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넓은 포용력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지는 하지 않을지라도 반대하지 않는다면 제지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한 것보다 사도로서의 특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안에는 약간의 특권의식과 이기심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의 공식적인 제자들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다가 개신교 신자들이 불교 사찰 그림에다가 십자표를 하고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등의 글을 써 놓은 것을 보고 저자 유홍준씨가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을 대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쓴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이렇게 포용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사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려다가 쫓겨난 대천사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커지면 상대를 포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라며 판단을 할 때, 그 말 안에는 ‘나는 안 그런데.’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만을 생각하고 그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만큼 상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상대를 판단하면서 자신이 더 커지는 것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포용력과 겸손은 별개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여자, 노인과 함께 사람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어린이도 받아들이고 그렇게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그 분을 보내신 아버지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비우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이미 내 자신이 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공간을 충분히 지닐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버리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저 사람은 왜 저래?’라고 생각하지 말고 먼저 포용력이 부족한 내 자신을 탓합시다. 먼저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인간을 받아들이신 분이 가장 완전하신 하느님임을 깨달읍시다. 예수님께서 완전무결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유다를 품어 안을 수 있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입니다.

 

포용력과 겸손 2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세계 어디서나 미사가 라틴어로 봉헌되었습니다. 공의회에서는 각 나라말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옛 미사만을 거룩한 것이라 주장하여 파문당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성직자가 프랑스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입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다시 라틴어 미사를 받아들이고 르페브르의 파문을 철회하였습니다. 이는 순전히 교회의 일치를 위한 목적이었는데, 또 많은 사람들이 베네딕도 교황의 이런 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회법을 어긴 4명의 추기경을 추앙했다는 이유로 1988년에 전 교황님인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파문당했던 사람이기 때문인데 그 후임자가 바로 그 파문을 철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치쁘리아누스 성인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선포하였고 교회에서도 공식적으로 이 말을 자주 인용해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범주를 어디까지 두느냐에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또 공식적으로 개신교나 다른 종교, 혹은 종교가 없는 이들의 구원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장 완전하다는 제자 요한도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바로 그리스도와 그의 대리자인 베드로, 또 사도단에 일치하는 신앙인들의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교회의 사람이 아닌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말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마치 교항 베네딕도 16세처럼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지켜보는 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종교나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배타적이 되고 국수적이 되는 이유는 바로 가장 정통적인 종교에 몸담고 있는 것에서 나오는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쇄국 정책을 폈던 것도 어쩌면 우리 문화에 대한 지나친 보호주의에서 비롯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두려움은 일찍이 세계 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에 의해 대단히 많이 손상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그 중에서도 서로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린이는 과부나 고아들처럼 아무런 힘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존재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그 겸손한 사람이 결국엔 더 높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다가 결국 하느님을 전부 받아들여 잉태하시게 되었고, 지극히 거룩하셨던 예수님도 당신 제자 중 검은 마귀였던 유다까지도 품어 안으셨습니다.

받아들임은 아픔이지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상은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어 멸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신을 청부살인 하려던 아들을 위해 자신을 대신 감옥에 넣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못된 자식도 자식입니다.

만약 손이 병들어 아프다고 해서 손을 바로 잘라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 온 몸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을 위한다는 핑계로 그 사람을 내쫓아버리는 것은 실제로는 온 몸의 주인에게 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감수하며 치료해 주어야합니다. 물론 병이 온 몸으로 번져 온 몸이 죽을 위기가 오면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를 배반하도록 놓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크고 겸손한 사람의 자세입니다.

 

 

 

 

 
< The prayer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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