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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비의 기름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작성자정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30 조회수412 추천수3 반대(0) 신고

자비의 기름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2009년 07월 20일 (월) 정중규 mugeoul@hanmail.net

 

 

   
▲에밀 놀데의 ‘The Great Gardener’

  

그의 눈길이 닿는 것에는

이상기후로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찾아와 힘든 요즘이지만, 그래도 캠퍼스의 늦은 밤 시간은 제법 선선하기도 하다. 정적이 깃든 교정을 전동휠체어에 몸을 싣고 혼자서 묵상 산책하는 기분은 자못 상쾌할 정도이다. 문천지(文川池) 호수 저편에서 건너 와 나뭇가지마다 풀 섶마다 숨어있다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갖가지 시원한 바람들도 고맙기만 하다.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는 인위적인 권력의 힘(force)과 자연적인 생명의 힘(power)을 구분 지었는데, 시원한 시냇물처럼 불어오는 바람폭포를 맞으며 생명의 기운을 가득 받고 보니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는 까닭을 알 것 같다. 범신론적 초절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이 모셨던 신령한 존재 대신령(大神靈-Great Oversoul)이라도 쿵쿵거리며 대지로 내려온 듯 생명의 큰 울림이 가슴을 치는 이런 시간이 참 좋기만 하다.

지나간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눈길이 늘 그런 사랑의 힘으로 다가왔었다. 세상과 모두를 바라보는 눈길이 그러하다면, 미다스의 손처럼 그의 눈길이 닿는 것에는 모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한없는 사랑으로 모두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축복하며 생명의 힘을 부어주셨던 그분이야말로 진정 파워풀한 존재이셨다. 어둠 속에 갇힌 불꽃으로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부활의 씨앗, 아니 그 어떤 처지일지라도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생명에 대한 그분의 확신이 수많은 병자와 죄인들을 치유시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되살리셨으니, 친구 나자로의 부활은 그런 그분의 힘(부활 권능)을 극적으로 표현한 상징적 이야기이리라.

시인 박노해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삶과 구원사업의 바탕이 바로 그것이다. 글이 아닌 오직 말씀에만 의지하는 구원사업 역시 그러하다. 문맹자도 아닌 그분께서 생전에 단 한 권의 책을 저술하지도 단 한 통의 편지를 남겨놓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가히 놀랍기만 하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2코린 3,6)고, 어쩌면 자기분열적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분 삶의 온전함과 진실함은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말씀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그대로 사셨다. 그분은 사랑을 말씀하시고 사랑을 온전히 사셨다. 언행일치의 삶은 그분 안에서 아주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립도록 아름답기만.. 사람과 기억을 통한 전승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도 당신의 모든 권한을 직접 위임하신다. 곧 문서를 통해 전승하지 않고 사람을 통한 전승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그분의 복음을 ‘먹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새기고, 돌판이 아니라 살로 된 마음이라는 판에 새겼던’(2코린 3,3) 것이다. 그렇게 살로 된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복음은 성령의 불씨가 되어 생전에 그분의 하신 바를 세상에다 그대로 옮길 수 있었다. 그분 구원사업의 독특함인 이런 재현성(再現性)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니, 사람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낳은 결실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건 사람의 마음 안에 박힌 ‘기억’에 의지하는 것이리라. 무슨 말인가. 그분의 공생활 때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삶과 말씀과 행적, 무엇보다 그 모든 것에 함께하면서 깨닫고 익히고 배우고 가슴에 새겨지며 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졌던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인품과 삶과 말씀에 관한 좋은 기억들, 참으로 그들이 직접 맛 본 그분의 모든 것들을 구원사업의 불쏘시개로 삼은 것이었다.

어쩌면 부활 체험조차 그 기억으로 인해 증거 되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부활 사건이 펼쳐지는 장면들은 모두 한 편의 수채화처럼 그립도록 아름답기만 하다. 빈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다가 가 “마리아!”하고 다정스레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라뿌니!”하고 즉시 응답하는 그녀의 가슴에는 얼마만한 그리움이 불타올랐을까!  

티베리아 해변에서 다시 만난 제자들에게 공생활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챙겨주시는 그 사랑 앞에 감히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필요가 없었으니, 그 사랑이 바로 그분이셨던 까닭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그분의 빵을 나누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분이 그분이심을 깨닫게 되니, 역시 그 사랑이 바로 그분이셨기 때문이다.

가슴으로 영혼으로 이어져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을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아름다운 기억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모두에게 알리는 복음 선포를 하도록 재촉했던 것이었다. 추억이, 그들의 심혼(心魂)에 남겨진 그분의 흔적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그 그리움이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건 선교행위를 자발적으로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랑의 불길인 성령이 그들 안에 살아 하나 되어 그들을 바람에 담아 땅 끝까지 실어다 놓았던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가슴에서 영혼에서 기억의 알갱이로 다시 가슴으로 영혼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참으로 사랑의 기억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주니, “주여, 기억의 힘이 위대하나이다. 무섭기까지 한 그 현묘, 무한한 다양성!”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고백한 그대로다.  

그분과의 만남은 이리도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것, 살과 살이 부딪고 마음과 마음이 출렁이며 서로 살아 숨쉬는 것, 그리하여 육화강생이 필요하고, 성사(聖事)가 필요하고 이콘이 필요하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신 그분은 마치 엄마가 아기와 눈 맞추려고 아기의 눈망울 속으로 들어가듯 당신을 인간에게 맞추어 찾아오신다.

삶과 신앙이 사랑에 열리고, 복음에 열리고, 실천에 열려 한길이 되어야

캠퍼스 광장 한 가운데서 함박눈 같은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묵상에 잠겨드는, 그분과 함께 했던 과거의 정원을 거닐며 가지는 추억 어린 정담의 시간은 늘 풍요롭기만 하다. 어쩌다 캠퍼스의 외진 곳 숲으로 조금 다가서다 파우스트의 호뭉쿨루스 같은 반딧불이라도 만나면 황홀 그 자체다. 이럴 때면 세상을 돌보는 정원사로 그분을 묘사한 에밀 놀데의 작품 ‘The Great Gardener’가 생각난다. 우주 저 너머에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는 눈길이 천지창조주의 눈길이라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느님과 내가 눈길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육화의 신비가 다름 아닌 그것이리라.  

우리 삶과 신앙이 사랑에 열리고, 복음에 열리고, 실천에 열려 한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머리 속에 고여 있을 그분 자비의 기름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온 몸을 젖게 해야 할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가슴을 무시했나봐. 가슴이 속상하고 소외되어서 아파. 너는 할아버지처럼 이렇게 살지 마렴. 저기 국회의사당 지붕으로 지는 해를 봐. 해가 하루에 한 번 지는데 우리는 그걸 못 보고 살지.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려무나. 세상에는 머리만 살고 가슴이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가슴을 채우고 머리를 비우면서 살렴.” 이현주 목사의 동화 한 구절이 가슴으로 젖어드는 아름다운 밤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정중규/ 장애인운동가, 다음 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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