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하는 법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05 조회수964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7 주간 수요일 - 기도하는 법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목록으로 돌아갑니다.

 

기도는 마치 숨과 같아서 숨 쉬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가 깨달은 것은 기도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치 애인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애인 만나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 법은 없습니다.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그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하기 싫으면 바라만 봐도 되고 어깨에 기대어 자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사랑 하는 사람 둘이 만나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의 마음과 표현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없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도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여쭈어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 대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기도하는 법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 안에 있는 내용이 내가 하고 있는 기도 안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가 둘 사이를 오고가는 사랑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나 들여다볼까요?

- 하늘에 계신 ;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땅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하지 않다면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따라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먼저 기도하기 전에 우리 마음이 깨끗한지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지 먼저 성찰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죄를 뉘우치거나 고해성사를 보는 일이 선행되어야합니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서 사시는 하늘로 들어 올리지 못한다면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분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야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오른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고 기본입니다.

- 우리 아버지 ; 기도는 인격간의 만남입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내가 누구인지 또 하느님이 누구인지 먼저 인식하지 못하면 기도는 추상적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누구이고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과연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하나 되어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기도의 출발은 항상 감사와 찬미가 되어야합니다. 내 자신의 영광만을 바라면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입으로만 되뇌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이집트를 탈출하였듯이 기도의 시작과 완성은 감사와 찬미입니다.

기도가 하나의 관계이고 만남이고 사랑이라면 그 분 앞에서 가져야 하는 마음자세는 겸손이고, 겸손한 사람이라면 자연적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기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힘들고 고통스럽다면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던지 참으로 만나고 있지 않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신 분을 만나면 당연히 행복해집니다. 이 행복이 바로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교만해져서 아버지께 불순종하고 그래서 그 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래서 행복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이와 반대로 행복을 되찾는 과정입니다. 기도가 일이 되거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이것이 사랑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여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당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버지께 불순종하여 행복을 잃었다면 다시 행복을 되찾는 것은 다시 겸손하여져서 아버지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뜻을 따르는 것도 그 분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여 아버지와 다시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고 그로 인해 행복을 다시 회복하게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마치 밥을 굶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에너지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임을 인정합시다.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하듯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우리가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용서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향합니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유혹거리에 스스로 가까이 가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봅시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교만해지면 죄를 짓게 됩니다. 아니 스스로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유혹을 이기는 힘을 줍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죄에 떨어지면 모든 관계가 끝장나고 행복도 잃게 됩니다. 양식이 몸을 지켜준다면 기도는 영혼을 지켜줍니다.

- 악에서 구하소서 ; 물 위를 걷다가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손을 뻗어 건져줄 것을 청합니다. 반대로 유다는 손을 내밀기 싫어 자살을 선택합니다.

죄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기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힘도 주지만 죄에 떨어졌더라도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기도에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내용은 있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에 다 넣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내용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도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제가 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신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묵상 중, “포도나무의 비유”를 이해하고 나서였습니다. 우리들은 가지들이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수액을 받지 못하기에 말라버리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 수액은 성령님을 상징하고 그 열매들은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온유, 친절, 인내, 절제와 같은 덕들입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온 저로서는 대단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들 공부할 때도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신학생들 중에서도 단연 기도를 가장 오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매일 성당에 가장 먼저 들어가 불을 켜고 가장 늦게 불을 끄고 나왔습니다. 당연히 공부할 시간도 부족해야 하지만 반에서도 계속 수석을 할 정도로 시험 성적도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신학생 때 유학도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이 행복했고 사제는 당연히 되어야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불러주신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제 성소에 대한 갈등이나 사제가 못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마치 결혼한 사람으로서 내 남편, 내 아내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임을 확신하면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사제가 되려는 저에게도 내 길에 대한 확신 자체가 행복의 표징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려는 노력에서 오는 자연스런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성소에 대해 힘들어하거나, 인간관계나 하는 일에 대해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를 더 해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제 성소에 대한 확신은 바로 기도에서 비롯됨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수녀님이 힘들어하기에 저는 기도를 좀 더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예수님 앞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잘 못 사는 사람도 많다고 말하며 또 기도를 이용해 일이 잘 되고 행복해지려는 이기적인 이유로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수녀님은 기도가 아닌 다른 방법이 없는지 물어본 것이었겠지만 저는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고 동료들과 오래 함께 한다고 더 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부부는 애인 사이였을 때 결혼해서 함께 매일 얼굴을 보며 살 때보다도 더 뜨거웠을 것입니다. 사실 잠시 사람들과 떨어져서 그리스도께 사랑의 수액을 받아 더 마음이 뜨거워져야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도 혼자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닐 때도 예수님은 혼자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더 가까워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기도해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고 하는데, 그럼 기도 안 해서 잘 사는 사람은 있습니까? 기도라도 하니까 그 정도라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단군신화에서 호랑이는 버티지 못하여 호랑이로 남고 끝까지 마늘과 쑥으로 버틴 곰은 사람이 되었듯이, 주님 앞에서 버틸 수 있을 때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쇠가 자석에 붙어있으면 쇠도 결국 자석이 되어버리듯, 기도는 그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유다가 예수님처럼 기도했다면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마음이 편안해지고, 하는 일이 잘 되고, 행복해지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기도하지는 않겠다고 하는데, 그럼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기도 이후에 저절로 맺히는 열매입니다.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입니까?

세상에 기도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요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며, 자신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따라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야 참다운 제자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따라서 하라고 기도하는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 주님의 기도>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