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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은총 많이 받는 방법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07 조회수954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7 주간 목요일 - 은총 많이 받는 방법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는데 동네에 집이 일곱 채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구멍가게도 없어서 군것질이란 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유일한 군것질이라고는 가끔 오는 엿장수 리어카 아저씨에게 집에 있는 쇠붙이며 병 등을 팔아 받아먹는 뻥튀기 과자가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은 사은 대잔치를 한다고 동네 아이들에게 뻥튀기를 공짜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달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각자 그릇들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 그릇의 크기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저는 내심 ‘그래도 공평하게 나눠주겠지!’라고 생각하고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는 두 손에 넘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각자 가져온 그릇에 가득가득 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숫대야를 들고 나온 아이도 거기에 가득 채워갔습니다. 저는 가장 많이 받아간 아이에게 비굴하게 붙어서 얻어먹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치 큰 공을 세운 사람이 큰 상을 받는 것처럼, 각자의 크기를 따지지 않고 똑 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공평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그릇의 크기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이 공평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그릇을 가지고 왔느냐에 따라 그만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은총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의 그릇을 지니고 있어야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먼저 은총을 주시는 분이 매우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위에 한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뻥튀기를 적게 받은 이유는 그 아저씨가 인심이 그렇게 후할 것이라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그 아저씨를 후한 분으로 판단했고 본인들이 판단한 만큼 받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풍부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는 자비로운 분임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두 번째는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크기가 감자크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인은 과일 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 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먼저 청해야 하는 은총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사랑, 평화, 기쁨 등의 온갖 열매를 맺게 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청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청하는 것이고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것들도 덤으로 얻게 될 터인데 성령의 은총보다 세상 것들을 더 청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은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마지막으로는 진정으로 원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복음에서 친구가 빵을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을 때 그냥 포기했다면 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친구가 빵을 줄 것을 믿고 끈질기게 청했기 때문에 그것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청하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그것은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죽기까지 청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시고 금방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청하려고 할 때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청하려는 마음을 지녀야합니다.

 

기도는 마치 활을 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냥 허황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과녁이 확실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쏘아서 맞지 않는다면 맞을 때 까지 줄기차게 쏘아야 합니다. 그래도 잘 맞지 않는다면 하느님 스스로 그 과녁을 우리 코앞에 놓아주실 것입니다.

 

왜 청해야 하는가?

어느 시골 마을에 제법 자란 호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런데 토질이 맞지 않는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열매가 열리지 않는 호두나무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호두나무는 마을 사람들에게 양질의 호두를 주기 위해서라도 꼭 열매를 맺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듬해에는 많은 호두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마을사람들은 호두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무에 돌을 던지고 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까지도 장대를 들고 와서 가지를 치며 나무를 손상시켰습니다.

호두나무는 주려고만 했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몇 해 동안 그렇게 상처만 받던 호두나무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호두를 맺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받는 것에 대한 은혜를 모르면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하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 주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지금 받는 은총도 더 이상은 오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무엇을 주려고 할 때는 상대로부터 ‘감사의 마음이라도 받았으면, 혹은 적어도 내가 주었다는 것을 기억이라도 해 주었으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어떤 거지들은 자선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자선을 받아주어 자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자신에게 자선한 사람이 감사해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많은 것을 받으며 살면서도 어떤 때는 기억하고 감사하고 보답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뭐, 누가 달라고 했나?’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주는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나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일부러 받아주어야 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때는 감사는커녕 오히려 상대에게 내가 자선이라도 베풀 듯이 ‘상대가 받아주는 나를 고마워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품게 됩니다. 감사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누군가 주었을 때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예수님은 오늘 자녀들이 부모에게 무엇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니 지치지 말고 하느님이 짜증날 때까지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청하기 전에 주실 수는 없을까요?

왜냐하면 인간은 호두나무에게 하는 것처럼 받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모든 것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그 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육체 안에 잠재된 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배은망덕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원하는 것을 받으면 감사하기 때문에 청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원해서 청하는 사람에게 더 잘 주시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은총을 주어 당연한 듯 받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청하지도 않고 은총을 받으면 자신이 받아야 할 당연한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저급한 기도라고 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무엇을 청하지 않는 것이 더 저급한 자녀입니다. 부모는 무엇이든 줄 준비가 되어있는데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무엇을 받아 고마운 마음을 갖기를 원치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청합시다. 그러면 무엇이든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하고 또 다른 것을 청합시다. 청하고 받고 감사하는 것은 자녀의 의무입니다.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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