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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8주일/감사하는 마음으로 "탓"은 나에게/글:배 광하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09 조회수378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28주일/루카 17,11-19


    에덴동산에서 제 탓 아닌 남의 탓

 

 

    ★“감사하는 마음으로‘탓’은 나에게” ★ 여자인 하와가 만들어졌을 때, 남자인 아담은 잠에서 깨어나 환호성을 외칩니다. 이제껏 짝이 없었던 아담에게 자신의 동반자가 생긴 것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 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게 됩니다. 하와는 그 열매가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유혹을 받고 열매를 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남자인 아담에게 줍니다. 아담도 그 열매를 먹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먹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분명 아담에게 왜, 열매를 먹었느냐고 추궁하십니다. 그쯤 되면 사내대장부가 풀숲에서 나와 자신이 따먹었다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고백했어야 합니다. 여자인 하와의 탄생을 그토록 기뻐하였던 아담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대답은,“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창세 3, 12) 하였습니다. 달리 번역하면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가 될 것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고자질(?)은 분명 남자가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묵상해 보면, 결국 인간의 원죄란 늘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고 모든 탓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에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안에서 자신의 탓을 뉘우치며 ‘제 탓이요’를 고백합니다. 말로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탓을 고백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늘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늘 불평불만의 삶이며, 남을 원망하거나 하느님께 항변하며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나를 위하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할 때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원망의 삶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시며 끝까지 인내와 성실의 믿음 생활을 하라고 격려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 11~12). 너무합니다. 우리는 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받게 된 첫 번째 유혹은 에덴 동산에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나무 열매를 다 먹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악마가 노린 것은 그 한 그루 나무였습니다. 우리는 자주 모든 것을 다 받았는데 하나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섭섭해 하며 너무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자녀들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부모님들, 자식의 미래를 위하여 당신의 생애를 송두리째 희생하셨는데, 자식들은 부모의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자신들의 욕망을 위하여 내어 놓으라 합니다. 부모님들께서 조상에 물려받은 이것만은 안 된다 하시면, 그 마지막 하나를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고 해를 끼치는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감사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악마의 유혹도 인간의 이 같은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반하여 악은 거꾸로 된 질문을 여자에게 던집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 1). 이때 여자의 마음속에는 이미 악의 유혹이 들어갔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도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 하느님께서 너무하신다는 배은망덕의 마음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이들에게서 감사의 마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더 가지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이내 서운함과 섭섭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작은 것을 잃어도 분노를 표출합니다. 내가 남에 대하여, 가족에 대하여 너무 한다는 마음이 들 때, 악은 이미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이 작은 것을 얻었을 때 기뻐하며 감사를 드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중 치유를 받고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은 그야말로 유다인 들에게는 천대와 멸시를 받던 인생 밑바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렸고 그것이 그를 구원으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배 광하 신부-






    생각과 말과 행위의 십일조 오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표현은 얼마나 되나? 한 달 동안 한 일 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일은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생 일어난 일들 중에 감사드릴 사건은 무엇인가? 하루 종일 한 말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인간관 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내내 한 일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마음으로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만났던 분들의 고마움을 십분의 일만 되새겨 잊지 않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은인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일이 너무도 많아 손꼽을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생활의, 말의, 행동의, 시간의 십분의 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치유된 나병환자 열 명 중에 감사한 사람은 겨우 십분의 일,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육신의 치유에 감사할 줄 알았던 그 한 명에게는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동안 행복해진다고.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행복 하고 싶다면, 구원받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아홉은 그만두고라도. 이 인옥(수원교구 기산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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