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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케노시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09 조회수465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신성(神性)을 버리시고 인간의 종이 되셨듯이 뿌스띠니아는 자아(自我)를 버리는 곳이다. 그래서 뿌스띠니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것을 말한다. 이는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들어가는 사우나와 같다.
뿌스띠니아는 마치 케노시스(kenosis;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여지며 ‘비움’,‘자기비하’라는 뜻을 갖고 있다)와 같다.
뿌스띠니아에 머물려면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의 평화 즉 ‘거룩한 무심(無心; holy indifference)’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거룩한 무심’을 갖게 되는 경지에 이르는 데에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비움(self-emptying)’은 일종의 케노시스이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비천해지셨듯이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과 싸워야 하고 자신의 꿈이나 계획 그리고 탐욕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성녀 소화 데레사(St. Therese, the Little Flower)는 러시아 사람들의 ‘비움’에 대한 생각과 아주 비슷한 예를 들었다. 성녀가 말했다. “저는 한 작은 공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무데나 던져버리고 나서 거의 십 년 후에 다시 집어드는 그런 공과 같습니다.”
러시아의 한 영성지도자(staretz)도 모름지기 사람은 숲속에 버려지거나 꼭 껴안다가 인형 통에 버려지는, 손이나 발이나 머리로 집어드는 봉제인형과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성인(聖人)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공이 되거나 봉제인형이 된다는 것은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꼼짝할 생각을 하지 않고 갈망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마치 중병(重病)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사람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들이 꿈꾸고 갈망했던 98%는 즉시 사라지고 만다.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인생관이 수 분 내에 바뀌게 된다. 뿌스띠니아에서의 삶이 이와 같다.
하느님을 만나 케노시스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모든 계획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뿌스띠니아 즉 사막은 매 순간 자신을 제물(祭物)로 바치는 제단(祭壇)이다.
아집(我執, self-will)은 항상 하느님과 자신 사이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아니다. 이 일을 해라.”하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즉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우리들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뿌스띠니아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뿌스띠니아는 여러분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다.
즉 뿌스띠니끼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듯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스스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인간의 종이 되신 것과 같은 그런 순간이 온다. 뿌스띠니끼는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뿌스띠니아에 머물 필요는 없게 된다. 순례자의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하느님의 화신(化身)이 된 것이다. 이제 그의 길은 바르고 평탄하며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해 둔 결과가 된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러한 일이 그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놀라운 순간이 온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씨부리는 사람의 우화를 읽을 때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 씨가 되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은 좋은 씨앗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뿌리는 깊게 멀리 뻗어나갔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태아가 되시고 어린이가 되시고 젊은이가 되시고 성인(成人)이 되신 이 신비를 이해해야 비로소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 다음에 마음을 비우게 되면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의 뜻에 모두 맡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드디어 우리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자신의 자유 의지여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바치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즉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예전에는 뿌스띠니아에 있을 때에도 두려워하고 악마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제는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케노시스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내가 할렘에 살 때 두려움에 대하여 묵상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도 두려워하신 적이 있을까? 겟세마니 동산에서 필히 두려워하셨을 것 같았다. 죄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꼭 같으셨다면 아마 두려워하셨을 것 같았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하고 기도하신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마르코 14:36)
여러분은 주님의 두려움도 알 수 있었겠지만 주님께서도 우리와 꼭 같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골고타 언덕으로 가셨다.
나는 오래 전에 할렘에서 이런 묵상을 하고 난 뒤에 두려움이 없어진 것을 기억한다.
나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 그리스도처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케노시스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이 있게 되면 사막에서 밤에 유령이 사라지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이 스르르 사라진다. (우리는 각자에게 내재되어 있는 독특성을 인정한다. 모든 사람들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기회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은 여러 이유로 존엄성을 상실할 수 있지만,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웃음꺼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에는 건전한 면이 있고 그렇지 않은 면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 건전한 두려움이 있게 되고, 하느님의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하거나, 자신만 잘 살려고 또는 남 앞에서 과시하려고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불건전한 두려움이다.
 
뿌스띠니아에 처음 가면 아주 엄격한 어머니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점차 젖을 떼듯 칭찬이나 아첨 등과 같은 욕망의 젖을 떼도록 해야 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고 거룩하다거나 놀랍다거나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오리가 등에 묻은 물을 가볍게 털어버리듯 이러한 평판에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조용히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혹시 대화 중이나 저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당신의 것이옵니다. 그 나머지 것은 저의 것이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누구나 칭찬 받기도 하고 비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든 비난을 받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나의 영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폴 핸리 퍼페이(Paul Hanley Furfey) 신부님이 나에게 말했다. “캐서린, 당신은 뛰어난 강론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룩한 순종으로 당신이 한 강론들을 잊어버리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 강론들 중 좋은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 나머지는 당신의 것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러시아에서는 이를 ‘거룩한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당신을 거룩하다고 하거나 악마라고 해도 괘념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의 마음은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케노시스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렇게 된다.
케노시스를 실천하면 두려움과 자만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뿌스띠니끼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성찰(省察)을 잘못하면 걱정을 하게 된다. 내면화(interiorization)는 하느님을 자신에게 모셔오는 것이며 자기 성찰은 제단(祭壇)에 바쳐야할 자신 안의 우상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오랜 시간 이러한 걱정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상들을 던져버릴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끝나는 자기 성찰을 통해 참 자아(自我)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난다. 깊이 내면화할수록 걱정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케노시스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말할 용기를 갖는 것이 가장 어렵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입을 벌리기만 하여라. 내가 채워 주리라.”(시편 81:11)
그러나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이 없거나 하느님께 말씀 드릴 용기가 없을 때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한 예를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말씀’을 훌륭하게 강론하기 위한 단체인 국제 강론 협회(The International Homiletic Society)에서 강론을 할 기회가 있었다. 주교님이 의장을 맡아 있었는데 약 45분 동안 강론 준비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주교님이 말을 많이 할수록 나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말할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녹초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척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아파서 강론을 하지 못하도록 해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강론을 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께서 나의 입을 채워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주교님의 말씀에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했다. 나는 강론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론이 끝나자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주교님은 매우 겸손한 분이어서 나에게 말했다. “캐서린, 당신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강론하기 위하여 공부보다는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교님이 틀렸기 때문에 또 하느님께서 나의 입을 채워주셨기 때문에 나는 주교님을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뿌스띠니아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을 비우게 된다. 이렇게 비움으로써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뿌스띠니아에서 뿌스띠니끼가 주의를 기울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뿌스띠니아에서 나가서 말해야 될 때를 알게 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마음을 비우고 케노시스에 이르게 되면 말할 용기를 얻게 된다. 사람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말을 대신하셔서 놀랍게도 말씀이 되어버리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뿌스띠니끼가 해야 할 일은 ‘입을 닫고’ 침묵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말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나래를 접는다는 것은 자신의 말의 원천을 막아버리는 것을 뜻한다. 무엇 때문일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벙어리가 되기 위해서일가? 아니다. 말씀이 우리의 말을 대신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외로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말의 원천은 막혀버렸다. 여러분들이 많은 묵상을 하여 조용한 영혼을 갖게 되면 여러분들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왜 그럴까? 여러분들이 말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대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면 통찰력을 얻게 되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우리 대신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보이게 되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게 되고 무엇을 말해야할지를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맡겨두면 분별력 때문에 우리들의 말이 아주 포용력이 있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자비롭게 되고 솔직해지게 되며 자신의 빛줄기가 다른 사람에게로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원하기만 한다면 이것도 뿌스띠니아의 한 매력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 차이 중의 하나가 말하는 능력이므로 몹시 괴로운 매력이기도 하다. 뿌스띠니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께서 주신 말을 함으로써 말하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 즉 말하는 법을 새로 배운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케노시스는 풋내기 수사(修士)가 성인(聖人)되는 과정이다. 이는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젊음은 지혜로 바뀐다. 마음을 비우게 되면 현명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마음을 잘 비우지 못한다. “자연은 비어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영성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하느님을 채우고 삼위일체를 채워야 한다.
 
케노시스는 처음에는 피곤하게 느껴지지만 지칠줄 모르게 되고 힘들지 않게 된다. 케노시스로 무화(無化)된 마음에 그리스도가 채워지고 온종일 끝없는 의문에 답변해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채워지고, 한 밤중에 기도하러 가시는 그리스도의 기도가 채워지게 된다. 당연히 뿌스띠니아에는 케노시스가 있어야 한다. 탐욕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게 되므로 당연히 지치게 된다.
그러나 케노시스의 경지에 들게 되면 피곤한 줄을 모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러 갈 때에도 피곤한 줄 모르게 되고, 수많은 질문에 답할 때에도 또 어느 곳을 가더라도 피곤한 줄 모르게 된다. 이렇게 피곤한 줄 모르게 되는 것이 뿌스띠니아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지칠 줄 모르게 만드신 것이다. 우리들의 말이 말씀이 된다. 약함이 힘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들이 끊임없이 제단(祭壇)에 크고 작은 일들을 바친 결과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따라 어느날부터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게 된다.
여러분들은 케노시스가 러시아 영성의 핵심 사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육화(肉化)를 통하여 당신을 비웠듯이 뿌스띠니끼라면 자기 자신을 비워서 건전한 생각과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만큼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는 뿌스띠니끼의 소명(召命)이다.
뿌스띠니끼기의 케노시스는 무엇보다도 숨어 있는 진실성을 찾아내게 한다. 나의 친구 중에 그림을 복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림 위에 덧칠을 하고 잠시 말린 후 다른 화학재료로 다시 덧칠을 한 후 말린 다음 본래의 그림을 복구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케노시스를 이러한 그림의 복구 과정으로 생각했다. 케노시스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삶에서 더러운 위선과 가장된 자아의 껍질을 벗겨서 그 껍질 아래에 숨어 있던 하느님의 참된 어린이를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쾌락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만든 점토(粘土) 상(像)을 갖고 노는 어린이와 같다. 그런데 어린이와 달리 그 점토 상을 숭배한다. 이렇게 소유는 우상이 되어 버린다. 뿌스띠니끼는 항상 빈 손이다. 뿌스띠니끼는 그의 건강과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지만 결코 그의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참 자아’처럼 보이게 하는 ‘거짓 자아’를 버리는 일은 무척 어렵다. ‘거짓 자아’를 없애는 일이 어려워도 반드시 없애야 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지식과 의지를 버려야 한다. 실제로는 하느님께 이러한 것들을 넘겨드리는 것이다. 러시아어로 ‘chestilishchye’는 세탁소를 의미하며 ‘chestyi’는 ‘깨끗함’을 뜻하고, ‘chestilishchye’는 옷을 세탁소에 보내는 것을 뜻할 뿐아니라 ‘연옥(煉獄)’을 뜻하기도 한다. 러시아어로는 ‘연옥’과 ‘세탁소’가 같은 단어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지식과 의지를 씻어주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세례로 모든 것이 씻어졌지만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력과 지혜의 선물인 케노시스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깨끗히 씻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씻어주시는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화(無化)를 통하여 깨끗하게 씻어진다는 것이다. 지식과 의지를 버리게 되면 한 동안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순간이 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순간이다. 있는 그대로 진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는 “주님, 저의 마음과 의지를 가져가셔서 깨끗하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하게 된다. 이런 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향후에 마음과 의지가 깨끗하게 되어 더 활기 차게 된다는 것이다.
부연 설명하기 위하여 싸르트르(Sartre)의 예를 들기로 한다. 나는 싸르트르에 관한 강의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강의를 준비하기 위하여 그의 몇몇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독서를 하게 되자 무척 피곤함을 느꼈다. 나는 침대에 주저 앉아 혼자서 중얼거렸다. “싸르트르는 네를 무(無)로 이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그것이 아니었는가? 신비주의자들이 말한 것이 그것이 아니었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산의 정상처럼 보이는 무(無)로 이끄신다. 하지만 싸르트르는 실제로 공(空) 즉 지옥의 바닥인 무(無)로 이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무화(無化)를 통하여 우리를 산 정상으로 이끄실 때 우리의 마음과 의지가 깨끗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이런 순간이 오기까지 기도 시간이나 피정시나 회심 시에 엄청난 자제심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마음과 뜻이 깨끗해진다. 이는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치열한 싸움이며 사막과 같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에 예리한 통찰력을 갖게 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또 분별력이 생겼기 때문에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 마음과 뜻을 맡겨버렸기 때문에 대신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돌려 받게 되며 새로운 재능을 받게 되는 셈이 된다. 자신의 우상을 버리는 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첫 걸음이 된다.
 
우리 모두 너무나 겁이 많기 때문에 케노시스가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따라서 우리들의 위선과 거짓 자아를 벗겨낼 때 성모님께 그 껍질을 들고 계시게 부탁하는 것이 더 낫다. 아무도 그 껍질이 벗겨졌을 때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거짓 자아에서 껍질을 벗겨낸다는 것 쯤은 안다. 우리의 몸에서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아 상처를 입게 된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의 삶에서 껍질을 벗겨 달라고 부탁드려야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과정으로 케노시스의 첫 걸음이다. 이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숨겨져 있다. 우리의 뜻과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과정이다.
 
우리들의 협조 없이는 케노시스가 일어날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지 않기를 바랄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내버려두시지도 않는다.
모든 덕과 마찬가지로 이 케노시스, 이 맡겨버림, 이 비움은 우리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케노시스는 일종의 죽음을 요구하며 이 죽음은 적(敵)이나 마귀의 공격을 받게 만든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은총이나 새로운 권능을 끌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폭풍우를 몰아오고 있는 허리케인의 눈 안에 있지 않고 허리케인 안에 있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우리들이 굴복할 준비가 될 때까지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마침내 “이 케노시스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야.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여 불가능하다고 생각돼.”하고 말하게 된다.
이 때가 아주 중요한데 더 이상 자기 변명을 하지 않고 마음이 비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도신경을 바친 후 진심으로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저는 마귀와 제 마음 속의 우상들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주셨던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저를 해방시켜주십시오. 저를 자유롭게 하시어 스스로 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시편 130:1)
이 경지까지 이르르면 자신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는 많은 난관을 겪어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은 아주 중요하다. 깨끗한 손이 서서히 문을 열어 제쳐서 우리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있어야 할 것들을 들여보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케노시스에 거의 다 이르렀다.
분별력이 거의 완전한 단계가 되어 아름다운 꽃처럼 개화(開花)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신비스러운 육화(肉化)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의 자궁에서 살을 취하시어 당신을 비우셨겠는가? 이제 주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모두 떠안으시기 위하여 스스로를 비우셨다.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서 속죄하시려고 당신을 비우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천국의 문을 다시 여셨다.
케노시스는 육화로 이끈다. 그런데 왜 케노시스에 들어가는가? 바오로 성인이 말했듯이 교회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하여서이다. 이것이 케노시스의 목적이다. 이는 이기적인 목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경지에 이르러도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인류의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손에 우리들의 케노시스를 선물로 드릴 수가 없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케노시스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단계들은 시작에 불과하다. 자신을 비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항상 주님과의 만남을 지속해야 한다. 인류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안고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의 관계에 틈이 생기게 된다. 이런 순례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관계에 틈이 생겨서는 안 된다. 가는 길은 험난하지만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게 된다. 뿌스띠니끼는 드디어 자신이 뿌스띠니아에 온 이유를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바보가 되셨기 때문에 그도 하느님을 위하여 바보가 되었다. 그는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참된 지혜인가를 깨닫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 자신을 비우면서 살아야 한다. 먼저 숨어 있는 거짓 자아를 벗겨내지 않으면 신비스러운 육화를 이룰 수가 없게 된다. 평생 거짓 자아의 껍질을 벗겨내고 자기 자신을 비워서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케노시스에 이르게 되면 자유를 만끽하고 평화를 느끼고 솔직하게 되지만 아주 단순해진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오 11:29) 단순함은 케노시스의 꽃이다.
(도허티(Catherine Doherty)의 『Poustinia』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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