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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감사하는 마음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11 조회수497 추천수6 반대(0) 신고

 

오늘 직원들 중에 아가씨 한분의 결혼식이 있어서 예식장에 다녀왔는데

예식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나들이차량과 합류되어 도로가 혼잡했다.

하지만 축하하러 가는 길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느긋하게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

다.”

예수님께서 우리 뒤를 따라오시거나 우리 앞을 지나쳐 가시거나 하지 않고

우리 앞을 마주 오신다는 생각을 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인생길에서 그렇게 마주오시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생각해

본다.

가끔씩 성전에 들어설 때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캄캄한 중에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더 가까이 계신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는데 살모사를 만났다.

이 사람도 깜짝 놀랐지만 살모사도 놀랐던 모양이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리는데 달리다보니 살모사가 자기 앞을 달리고 있더란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

 

이 말씀대로 흉측한 나병환자가 사제에게 자기 몸을 보여줄 수 있으려면 그 나병이

나아야 한다.

그런 나병환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사제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나병이 낳을 것이란 암시를 담고 있고 그들은 그 말뜻을 즉시 알아차렸다.

하지만 알아차렸다기 보다는 욕심이 앞섰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 끔찍한 나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 그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병을 낫우고 싶은

욕구와 욕망에 따랐을 것이다.

그들에게 믿음의 출발점은 그들 자신에게 있었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순간 나병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가라”하고 말씀하신 순간에도 나병은 여전했고 길을 가는 도중에 나병

이 나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나병환자와 같이 육체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가진 것만이 병이 아니라,

정상적인 혹은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모든 것이 병이요, 그것이 더 심각한 병이

라는 사실이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그런 것이 더 분명하다.

하느님이 본래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못하게 된 모든 것이 병이요

그것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육신으로는 아무리 건강해도

영적으로는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어서 도저히 회복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을 수 있

다.

 

그런 우리의 병이 낫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어떤 병이든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복음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다.

“가라! 가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수 많은 가축과 논 밭과 종들을 거느리고 기름진 땅에서 풍족하고 살고 있는데 어

느날 갑자기

그 “땅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

과 그 말씀대로 길을 떠난 아브라함.

 

병이 낫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병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더불어서 병을 만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들이란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말하게 된다.

왜 접니까?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왜 저에게 이런 불행이 닥쳐야 합니까? 왜 저란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행의 원인,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께 있다는 말이다.

이래서는 병이, 고통이, 불행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말 연속극 이웃집 웬수에서 지영이가 한 말,

“애초부터 나에겐 불행은 없었어. 내가 못나서 견뎌내지 못했을 뿐이야”

 

고통이, 불행이 왜 있냐고, 죽음이 왜 있냐고 묻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 시작은 인간에게 있다.

우리 스스로 초래한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할 불쌍한 처지임을 받아들일 때 그분의

 말씀에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가라”

 

아브라함에게 했던 말도 그것이었다.

아브라람이 살고 있는 기름진 땅, 풍족한 열매가 맺히는 안정된 그곳을 떠나야 하

느님이 마련해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주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

름진 땅이 아니었다.

광야와 돌무더기 산이 국토의 2/3를 차지하는 척박한 땅이었고 아브라함은 그곳에

서 두 번이나 죽을뻔 하였다.

인간적인 안락함, 사람이 이루어낸 안락함 속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빛을 내지 못

한다.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께 마련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십자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아드님 예수님은 그것을 기쁘게 지고 가셨다.

열명 중에 겨우 한 명이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것은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지를 알려준다.

 

“단순한 기쁨”이란 책에서 피에르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 끝나고 선거가 한창일 무렵,

소란스런 군종 속에서 정적들이 나를 향해 비방을 퍼부을 때 어떤 자가 소리쳤다. ‘

'저는 샘 욥이라는 랍비입니다. 독일군 점령 당시 어려움에 처한 제 친구들을 신부

님께 맡겼던 사람입니다.

어느날 밤 신부님 친구분들의 안내를 받아 산으로 피신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헌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걸 보신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구두를 벗어주시고 눈길에 맨

발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겨울에 눈 덮인 산길을 맨발로 걸어간다는 것은 십자가위에서 손 발에 못이 박

히는 고통보다 더 할 수 있다.

만일 이 “눈길 위의 맨발”이 단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과제여서 그렇게 했

다면

그런 자신을 기억해준 랍비가 고맙기는 하겠지만

그 일을 감행했던 피에르 신부의 기억은 다시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은 고통으

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눈길위의 맨발”을 기꺼이 감당하고 싶은 예수님의 수난의 동행길로

여기고 기쁨중에 해냈다면

그 기억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은 은총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문제해결에만, 나병치유에만 관심을 집중하

그것을 치유하는 힘의 권능은 금새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 치유의 힘이 하느님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집중한다면

육신의 치유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더 감동하고 감사의 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했던 사람은 열 사람 중에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다.

 

예수님의 물음은 우리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뿐이란 말이냐?”

 

감사하는 마음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하느님의 도움, 축복, 선물이 있었는지,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이, 축복, 선물이 있었는지를 알고 그것을 감사하는 것은 얼마

나 더 좋은 일인가!

우리에게 도움과 축복과 선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

그것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욱 더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 인생길 안에서 나에게 은총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은 얼마나 되느냐? 한

1/10쯤은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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