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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11 조회수926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seeks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Lk.11.42)
 
 
제1독서 갈라티아 4,22-24, 26-27, 31-5,1
복음 루카 11:29-32
 
어제는 우리 성당에서 추수감사 미사가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시간이었지요. 더불어 그 마음을 간직하면서 본당 잔치도 했습니다. 그 동안 본당 부지 마련을 위해서 애를 많이들 쓰셨거든요. 따라서 그 동안의 노고를 푸는 마음을 갖고서 본당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 안에서 조금 안 좋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당 잔치를 위해서 성당에서 봉사하시던 어떤 형제님이 작업을 하는 쪽으로 걸어오는 어떤 자매님을 향해서 큰 소리로 “이쪽으로 오시면 안 돼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말 자체로는 별 다른 내용이 담겨 있지 않지요. 그러나 격양된 목소리가 담긴 그 말을 듣는 자매님께서는 기분이 참 나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동시에 만약 내가 그 소리를 들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제는 저한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가 실수를 해도, 웃으면서 ‘신부님께서 그럴 수 있지 뭐.’라는 식으로 받아 주십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에게는 그렇지 않더군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라는 화가 섞인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아래 지위에 있는 사람이거나,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한테 기준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기준을 맞추고 있다면 하느님을 대하듯 어떤 사람에게든 사랑으로써 다가서겠지요. 그러나 자기한테 기준을 맞추고 있으니, 차별된 사랑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표징을 요구했지요. 즉, 자기들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셨던 이유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예수님께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믿으면 자기들에게 돌아올 혜택이 많은 것이지,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 특별한 혜택이 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그들은 착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바로 자기한테 기준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내 자신은 과연 어디에 기준을 맞추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 기준을 맞출 때에만 그분의 표징을 나의 일상 삶 안에서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큰 소리를 치지 맙시다.




한 나그네가 홀로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걱정에 휩싸였지요. 왜냐하면 아무리 걸어도 마을이나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거나 마실 물이 있는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죽을 형편이었기 때문에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이제 살았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거야. 이 발자국을 나침반 삼아서 부지런히 걷자.’
 
나그네는 발자국만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걸어도 마을과 오아시스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짙은 밤이 되었고, 섬뜩한 생각이 들어 그 발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발자국은 바로 자신의 발자국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는 자기 발자국을 따라서 제자리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삶을 허비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고해성사 때 보면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백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발자국만을 쫓아가면 절대로 마을과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똑같은 죄와 잘못의 반복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 안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함께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곧바로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네베 사람들은 곧바로 모두가 다 회개하지요. 이처럼 곧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모습이야말로 주님의 표징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엉뚱한 곳에서만 표징을 발견하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앞에 직접 나타나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을 해주신다면 더 쉽게 당신을 받아들일텐데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이 바로 엉뚱한 곳에서 주님의 표징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곧바로 회개하였던 니네베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일상 안에 주어지는 주님의 표징을 보고 곧바로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고통은 참아내면 되지만 포기는 영원한 상처로 남는다(랜스 암스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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