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9주일 2010년 10월 17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14 조회수391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29주일     2010년 10월 17일


루가 18, 1-8.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그 비유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약한’ 재판관도 과부가 성가시게 굴면, 과부의 소원대로 판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지 않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예수님이 가르친 믿음이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되겠는가 묻습니다.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자기의 환상을 쫓는 행태들이 공동체 안에 이미 있었고, 복음서는 그런 현상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기도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정화수를 떠놓고 혹은 성황당에서 비는 기도가 있습니다. 심청전의 선원들이 심청이를 제물로 용왕에게 바치면서 빌던 기도가 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하면서 자기가 모시는 신에게 바치는 기도도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기도들입니다. 사람이 소원성취 하겠다는 기도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 중에도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능력을 얻고자 하는 기도가 있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얻기 위한 기도도 있습니다. 자녀를 입학시험에 성공하게 해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있고, 선거에 당선되도록 혹은 사업이 잘 되도록 비는 기도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한 기도들은 많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도 자기 앞에 닥친 중요한 일을 바라보면서 당연히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그 일 위에 내려올 것을 비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 일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오시고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을 항상 빕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혜택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청하는 기도가 있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우리 죄를 용서하시라’는 기도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청하는 기도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충만히 살아 계시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신 하느님이 생각나고, 우리에게 잘못 한 이를 보아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기도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셔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비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기원에는 모세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 깨달음을 핵심으로 발생한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이 계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근거로 발생한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깨달음 후에 모세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구약성서는 말합니다.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 간에 미래의 상호 행동 방식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받들어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모세가 준 10계명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삶의 실천양식을 열 가지로 나누어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그런 신앙 전통 안에 살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도 인간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어떤 연대성을 사는지를 나타냅니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을 산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새로운 계약’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하느님과 함께 연대하여 사는 방식을 예수님이 새롭게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과의 연대성에 충실하였고, 부활은 그 연대성이 죽음을 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고린토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선포도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15,14).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사는 것이고 부활이 그 연대성을 보장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 앞에 하는 우리의 기도도 자기 한 삶 잘되기 위한 소원을 비는 것이라면, 그 기도는 우리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출애 33, 19)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체험과는 무관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자비롭기 위해 노력하고, 하느님이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기도도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이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수양(修養)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나의 삶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여서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세례자요한이 예수님을 만나서 한 말을 전합니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3,30).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커지고 자기 자신은 작아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외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그분이 철저히 사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느님이 차지하시는 비중이 커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기심은 작아질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우리의 머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 안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연대성, 우리 이웃들과의 연대성을 사는 사람이 자기 안에 하느님이 더 크게 자리하시게 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분이라, 그분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비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도 사랑도 하느님의 일이라 우리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실천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