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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과 꾸준함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17 조회수864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9 주일 - 믿음과 꾸준함


 

제가 신학생 때 유학 나와서 방학 동안에 가던 이태리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곳엔 역시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몇몇 사람들과는 일주일 동안 독일 여행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 중에 꽤 친분이 있었던 한 40대의 주부가 있는데 제가 석사논문을 쓸 때 이태리어 교정을 해 주던 분입니다.

제 생각만인지 모르지만 조금은 저를 좋아한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한 번은 독일 여행 중에 한적한 길에서 저에게 팔짱을 끼려하고 너무 가까이 붙기에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화가 난 듯이 저에게 자신을 속이며 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좀 그 자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사제가 되어 다시 나왔을 때는 처음 한 번 연락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저의 마음속에 껄끄러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문 이태리어 교정을 해 줄 사람을 생각하다보니, 물론 가장 먼저 그 자매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 자매에게 무엇을 부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을 쉽게 청할 수 있는 관계가 가까운 관계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엇을 부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 사달라고 안달을 내다가도 그것을 사 주던 사 주지 않던 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신발도 신을 줄 몰라 부모에게 신발을 가져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에게 무엇을 맡겨놓은 것도 아닌데 끊임없이 요구하기만 하고 부모들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그들로부터 빚진 것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해 주기만 합니다.

이것이 ‘관계’입니다. 무엇을 아무 부담 없이 청할 수 있는 관계가 좋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멀어지면 아주 작은 것도 부탁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서로 주고자하는 마음이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청하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청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청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주 청하기는 좀 그런 관계라서 어쩔 수 없이 곤란한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을 해결해 주십사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만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 관계까지 만이라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청하는 것은 저속한 기도이고 감사하는 기도만이 높은 수준의 기도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만약 하느님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청하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미사시간에 떠들어서 제가 미사 중간에 그 아이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집에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잘못했다고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버렸습니다. 저는 미사 중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요.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 항상 대기해주시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학사님이 교사들에 대해 안 좋은 말씀을 하시기에 감정이 좋지 않다가 우연히 술내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한두 병씩 마신 상태에서 누가 시작도 안 했는데 자연스럽기 시합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또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내기를 반드시 이기게 해 주세요.’ 하고 속으로 기도하고 똑 같은 속도로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소주 한 병 반 마시고 길에서 잔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 소주 여섯 병씩을 더 마신 것 같습니다. 그 학사님은 세병 정도 마시더니 휴지로 입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연신 휴지에 소주를 뱉어 냈습니다. 저는 그대로 다 마셨습니다. 나중엔 그 학사님 앞에 젖은 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러고도 그 학사님은 K.O. 당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도 멀쩡하여 그 학사님을 업어 바래다주었습니다. 아마 그 학사님도 기도를 하였다면 제가 졌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어 안수하여 병이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고 오래 아기를 갖지 못하다 임신을 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제가 겪은 최고의 기적은 소주내기였습니다.

그 때는 ‘그런 것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까지도 기도할 수 있었던 하느님과 친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걸 하느님께 청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실 분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작은 것까지도 저렇게 기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르짓다의 7기도’입니다. 하루에 15분씩 12년을 바쳐야 완성되는 기도입니다. 한 번을 다 바치고, 두 번째 바치는 것이 벌써 2년째 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기도를 바치라고 권유를 하였지만 어떤 누구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12년 동안 바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기도의 효과는 너무 커서 기도하는 도중에 변화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다 바치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지위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연옥의 고통을 받지 않고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등의 수많은 은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권했더니, 그렇게 약게 머리를 굴려 연옥을 안 가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술내기 이기게 해달라고도 기도하는 제가, 연옥을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못하겠습니까? 치릴로 성인은 연옥의 잠깐의 고통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만 꾸준하게 청하면 그 고통을 면할 수 있는데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4년째 매일 꾸준히 기도해보니, 결국 그렇게 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청할 수 있는 믿음이 저를 성장시켜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그렇게 꾸준하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물건을 찾을 때도, ‘여기에 반드시 있어!’라는 확신이 있으면 꾸준히 찾을 수 있지만, ‘아마, 여기에 있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찾으면 조금 찾다가 못 찾고 포기하고 맙니다. 바로 꾸준하게 청할 수 있는 것이 그 분께 대한 믿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과부도 못된 재판관에게 쉼 없이 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줄 것을 청했습니다. 재판관은 그 여인의 집요함에 겁을 먹은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과 그것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기로 항상 준비하고 계신 분이시라는 믿음이 있으면 끝까지 그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기도하다가 마는 것은 믿음도 없고 그것을 진정으로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은총을 준다면 그런 사람은 그것이 곧 자신의 공로인 양 생각하여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과 의지가 작은 사람에게는 은총도 작게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를 들어주는 것보다 겸손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열심히 당신의 잔을 거두어 주십사고 기도했지만 아버지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딜레마 때문에 기도를 빨리 포기하기도 하는데, ‘과연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부합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조금 기도하다보면 하느님께서 빨리 응답을 주시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러면 우리들은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보다!’ 라며 올리던 기도를 접고 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를 들어주어야 하는지 들어주지 말아야 하는지 결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청하기만 하고 들어 줄지, 들어주지 않을 지 결정하는 것은 부모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에서 재판관이 재판을 했겠지만 그 결과가 정말 과부에게 유리하게 나왔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말씀의 두 주인공 중의 하나로 재판관을 사용하신 것은 결국 그 청을 들어줄 지 들어주지 않을 지 결정하시는 분은 영원한 재판관이신 하느님뿐이심을 말씀하시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청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와 정을 통하고 그의 남편까지 살해한 벌로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을 시켜 밧세바가 임신한 다윗의 자손이 죽게 될 것이라고 전합니다. 다윗은 크게 뉘우치고 단식과 보속을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걱정을 해도 다윗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정말로 죽고 맙니다. 그러자 그는 옷을 갈아입고 이전의 잘 먹고 잘 마시던 삶으로 바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이 모습에 놀라자 이미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은 이상, 더 희생과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을 때는 최대한 매달리다가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면 그 뜻에 절대 순종하고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항상 옳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슬픈 여운을 남기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그래서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는 사람이 매우 적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라도 종말을 재촉하게 하는 신앙인들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느님께 청하며 사는 사람들이 됩시다.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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