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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탓일 수도 있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19 조회수897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9 주간 화요일 - 기다림


 

한 번은 환청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할 때였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래서 그 자매가 매일 거의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저에게 했었습니다.

전화가 올 시간이 되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정신은 온통 전화 벨 소리에 쏠려 있었습니다.

한 번은 땀을 흘려 샤워를 바로 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샤워를 했습니다. 그러나 물소리가 너무 커서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들려 거의 비누를 칠한 상태로 화장실을 나와 방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전화는 울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것이 기다리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환청까지도 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항상 깨어있으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혼인잔치는 언제 끝날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뜻은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더라도 죄 없는 상태에 있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살라는 뜻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기다리다 혹 잠이 들 수 있지만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바로 달려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데 그 주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종이 주인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릴 수 있을까요? 오히려 주인이 없으니 본인이 주인 노릇을 하느라 주인이 더디 오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님은 제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주인이 무서워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사랑하여 마치 신랑이 오는 것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거의 안달하며 그 분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해야 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잘 기다릴 수 있고 부모가 자녀를 잘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심판자로서 기다리기를 원하시지 않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맞이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을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인이 아니라 마치 종처럼 사랑해 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그 얼마나 달콤합니까?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기다림이 행복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알면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은 설레임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소풍 가기 전 날 잠을 이루지 못한 것 등을 기억해보면 이것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소풍 가는 날보다 그 전 날이 더 기대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성탄절보다 성탄 이브가 더 즐거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만나는 날이 이 소풍 전날이나 성탄절 이브처럼 기다리는 날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 사제의 아버지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날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신 모습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는 날 주님께 가고 싶은 소망대로 그 날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한 인생을 주님께 바치며 사셨기 때문에 주님께 당당히 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산 사람들은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여 수고한 것을 반드시 갚아주실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월급날만 기다린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월급을 타시는 날이면 초코파이 한 박스를 사오셨습니다. 동네에 가게가 없을 때라 초코파이는 우리에게 가장 맛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을 아시기에 아버지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오시든지 우리 형제들은 단숨에 끝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산 사람에게 올 것은 당신의 사랑과 보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서 이것을 느끼기 때문에 주님을 더 기다립니다. 어쩌면 죽음을 더 기다립니다.

열심히 삽시다. 주님께서 무서운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띠를 매고 우리에게 시중들 준비를 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탓일 수도 있다

 

제가 십몇 년 전에 우연찮게 라디오에서 한 갤럽조사 발표를 들었었는데, 요즘은 그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 통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한국성과학 연구소가 기혼남성 2,000명을 대상으로 한국 남성 성 의식 및 성 실태조사를 하였습니다. 혼외관계 경험을 알아보고자 “파트너 이외의 여성과 성관계를 해본 경험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78%가 ‘그런 적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은 18%에 불과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대상자들이 “지금의 결혼 (동거)생활에 만족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매우 만족한다.’ 27%, ‘대체로 만족한다.’ 44%, ‘보통이다’ 13%, ‘불만이다.’는 2.4%로 나왔습니다. 전에 들었던 것과 크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 15년 전에는 여성의 혼외 경험도 15%나 되었었는데, 그것도 지금은 약간 더 늘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현상들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의 결혼 생활에 대부분이 크게 불만이 없으면서도 남성들은 육체적인 본능에 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은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남성에게만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지만, 남성들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하나의 씨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비해, 남성은 종족 번식을 위해 많은 씨를 뿌릴 수 있는 동물적 본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여성의 혼외 관계에서는, 여성이 그런 관계를 가진다면 이미 남편을 마음에서 내쫓아버린 것을 의미하지만, 기생집에 드나들어도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는 것이 남편들일 수 있습니다.

여성도 남성도 하느님 앞에서 죽기까지 사랑하며 신의를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이럴 수도 있다면, “혹 이것이 나의 탓은 아닐까?”라는 것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어쩌면 배우자가 나에게서 충족되지 못하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내가, 반찬이 점점 하기 싫어져서, 자신이 요리하기보다는 밖에서 사 오는 경우가 많아지고, 남편이 출근할 때 점점 따라 나오는 거리가 줄어들더니 이젠 문도 안 열어보고 인사하고, 남편이 퇴근할 때 집을 자주 비우며, 맞으러 나오지도 않거나, 아이들에게 집중하다보니 남편은 집안에서 투명인간이 되어버리고, 남편 코고는 소리와 술 냄새가 싫어서 각방을 쓰게 되며, 수고한다는 말보다는 이것저것 단점만 보여 잔소리하게 되고,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하게 된다면, 그렇더라도 남편이 신의를 지켜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쨌건, 밖에 나가 술집에 가면 ‘사장님’하며 왕 대접을 받는 남편이 그런 유혹에 더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반대로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내를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며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주지 않는다면 아내도 다른 누구에게서 남편에게 부족한 사랑을 채우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나에 대해 최선을 다해주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더 신의를 지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이 신랑처럼 밤늦게나 새벽에 들어올 때, 허리에 띠를 매고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종에게는 당신이 직접 종처럼 시중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새벽까지 외출복 차림으로 신랑을 맞기 위해 기다리는 아내가 있는데도 그런 아내를 두고 잘못을 저지르고 다닌다면 그런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그런 사랑을 배신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배우자에게나 하느님께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낀다면 어쩌면, 그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먼저 내가 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충실히 합시다. 그것이 항상 깨어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깨어있다면 당연히 그 분이 합당한 사랑을 주실 것이고,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 또한 나를 합당하게 사랑해 줄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는 것, 그 대상이 하느님이건 나의 이웃이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그대를 향한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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