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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만남---<뿌스띠니아> 중에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3 조회수347 추천수4 반대(0) 신고
내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러시아인들은 하루나 이틀을 뿌스띠니아에서 지내는데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뿌스띠니아에 가지만 대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간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가 뿌스띠니아에 머물렀을 때 받았던 것을 공동체나 그의 가족들에게 말해야 한다. 러시아에서는 온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한다. 나는 뿌스띠니아에 다녀 온 뒷 날 또는 저녁식사 시간에 이를 마돈나 하우스에서 전한다. 내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절을 하고 “복된 삼위일체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하고 말하거나 비슷한 인사를 하면 그들은 “또한 당신과 함께”하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그들에게 전한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습니까?”하고 묻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뿌스띠니아에 들어가는 이유가 기도와 금식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뿌스띠니끼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의 날개를 접고 자신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안인들은 “당신의 머리를 당신의 마음에 넣고 깊고 심오한 내적인 침묵을 얻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하여 깊은 침묵 속에 있게 되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고 말한다.
 
내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정신이 맑게 되고 마음에 평화가 있으며 그런 정신과 마음으로부터 성령의 열매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용히 눈에 보이지 않게 성령께서 말씀과 생각과 문장까지도 보내주시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 모든 말이 아주 ‘신비스럽게(mystical)’ 들립니다.”하고 말한다. 동양에서 신비스럽다고 하는 뜻과 서양에서 신비스럽다고 하는 뜻은 다르다. 나는 서양에서는 신비스럽다고 표현하지만 동양에서는 일상적인 많은 일들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뿌스띠니아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문을 노크하신 후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나에게는 전혀 신비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정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많은 서양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들은 자격이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뿌스띠니아에 있는 동안 단 일 분이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뿌스띠니아에서 당장 나와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아무 가치가 없는 나에게 말씀을 전하러 오시다니 하느님은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가.”하고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자격이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래도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마돈나 하우스 주변에서는 뿌스띠니아에서 공동체로 돌아 온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하고 묻는 것이 예사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께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하는 뜻이다.
 
뿌스띠니아에서 들은 말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할지 모른다. 그러나 24 시간 머문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대화하는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뿌스띠니아에 머문 뿌스띠니끼라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즉 다른 사람을 위해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하느님을 만나뵈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모두 전하게 된다. 들어야 알게 되고맛을 보아야 알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서로 나누려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는 못 듣게 된다. 여러분이 들은 것은 복음의 일부분 즉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 안에는 주님에 관한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반드시 전해야만 한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뜻을 깊이 이해하고 나서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지만 “말하기 싫어!”하고 말하면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면 여러분은 잠을 못 자게 되고 먹을 수도 없게 되고 아무 일도 못 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된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게 되면 쉴 수 있게 된다. 말씀을 전할 때에는 저절로 말씀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는 예언이다. 이 장에서는 여러분에게 내가 ‘뿌스띠니아에서 들은 몇몇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할 때 곧잘 이용하는 것은 두 팔을 펼치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믿음과 기도 중에 한 손으로는 하느님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 모양을 한 채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는 모습이다. 뿌스띠니아에서 내가 들은 말씀은 이 두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믿음
오후 일곱 시 25분인 저녁이었다. 뿌스띠니아에서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 무의미하게 보냈다. 아마 내가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햇볕 아래 드러누워서 영성 서적들과 성경에서 인용한 한 두 마디를 읽는데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 비몽사몽 가운데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지만 아무 특별한 말씀이 없으신 것 같았다.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더 이상 못 오게 막으신 곳에 내가 멈춰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쉬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쉬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무척 감미롭게 들렸던 기억이 난다. 태양은 빛나고 있었고 나는 편하게 쉬었다. 그러고 나서 강에서 수영을 하고 좀 더 쉰 후 잠깐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일곱시가 다 되어 가자 서서히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말씀은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믿음(faith)’였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영문도 모르게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고, 아무 반응이 없는 잠자는 사람처럼 되었다.
나는 평소에 믿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때 믿음의 다른 의미가 떠 올랐다. 나는 믿음을 다시 깊이 생각하고는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믿음은 선물이며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우리가 믿음을 청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청했을 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듯이 믿음을 청할 때에는 하느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는 것 같았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을 마주 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이런 단순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을 마주 보시고 싶어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평소에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작은 은혜를 간청할 때에도 우리의 눈을 감을 뿐 아니라 영혼의 눈도 감고 하느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깊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믿음, 이 하느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사(聖事)로 제도화하신 세례를 받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을 치유했다. 이들 중에는 문둥병 환자도 있었고, 눈 먼 사람도 있었고, 하혈병을 앓는 여인도 있었고, 로마 병사의 종도 있었고, 어떤 문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인류 역사이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절대자(Supreme Being)를 믿고 치유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믿음은 사랑의 아버지이고 소망의 아버지이고 신뢰와 확신의 아버지이다. 믿음은 모든 인간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서서히 자라고 믿음을 갖기 위하여 기도하고 믿음을 얻기 위하여 하느님을 찾지만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만든다.
 
믿음은 누구나 한 때 겪게 되는 어두운 밤을 마음 편하게 들어 갈 수 있게 해준다.
믿으면 평화롭게 되고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 믿음은 인간의 기초를 만든다. 아무도 자신의 믿음이 깊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믿음이 잉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매진하면 하느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
믿음은 인생의 어둠과 얻게 될 소망 사이를 아무 생각없이 그리고 서서히 어린이처럼 걸어가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신 말씀을 듣지 못한다.” 나는 믿음은 일종의 어리석음으로 이 어리석음은 하느님 자신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하느님께 청하여 치유 받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이다. 믿음은 놀랍고 환상적이고 비록 만질 수 없고 무게를 잴 수 없지만 눈에 보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다.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매일 더욱더 밝은 날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얼굴을 하느님께로 돌려 눈을 서로 맞추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베일은 점점 더 얇아져서 하느님께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믿음은 경계를 없애 버린다. 믿음은 사랑을 횃불로 만들게 한다. 믿음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켜서 횃불이 활활 타게 만든다. 믿음은 순교의 손을 뻗쳐 순교자가 무릎을 꿇게 만든다. 믿음은 전염성이 강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믿음을 거부하거나 비웃을 수 있을지 모르고 믿음을 가진 사람을 죽이더라도 인간은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는 못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을 죽이면 순교자의 피가 믿음의 씨가 되어 더욱더 번성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특히 삶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은 믿음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그 일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동료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망설이지 않고 또 남에게 알리지 않고 믿어야 한다.
머리로 믿지 말고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 머리는 자기 합리화를 하게 만들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확신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게 만든다. 머리는 손을 뒤로 묶어 순교자와 창녀와 세리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들 중 극소수의 사람만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믿는다면 사람도 믿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악한 사람도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믿음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은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믿음이 없으면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고 사랑도 없게 된다. 즉 사랑이 없으면 소망과 믿음, 확신이 없이 죽게 된다. 제대로 죽지 못하면 아프게 되고 약해지고 지쳐서 대화도 하지 못하게 된다.
믿음만이 대화를 재개시킬 수 있다. 그렇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를 믿어야할 시기이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서 믿음이 약함을, 확신이 없음을, 서로를 믿지 못함을 개선시켜달라고 간절히 청해야할 시기이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하느님께로 돌려 믿음의 두려움을, 서로를 믿는 두려움을 없게 해달라고 청원해야할 시기이다.
 
“주님, 지금 저희가 믿음을 깊게 해주십사 하고 다 함께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저희가 당신께 마음을 열게 해주십시오. 저희의 머리가 마음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소서. 저희가 믿음, 소망, 사랑, 확신 속에 살게 해주소서. 다른 사람을 존경하게 해주소서. 믿음이 없어 놀림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해주소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게 해주소서. 주님, 저희를 치유해주소서. Maranatha—주님, 오십시오. 저희는 당신을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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