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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4 조회수718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Whoever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Lk.18.14)
 
 
 
제1독서 집회 35,15ㄴ-17.20-22ㄴ
제2독서 2티모 4,6-8.16-18
복음 루카 18,9-14 
 
저는 운동경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중계를 하는 운동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보는 편이지요. 특히 요즘에는 프로야구의 막바지라서 야구에 흠뻑 빠져 있답니다. 그런데 야구를 보면서 의외의 경우가 자주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히 점수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한 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또 반대로 점수를 도저히 낼 수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대량 점수를 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의외성 때문에 야구가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의외성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반응입니다.

도저히 득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편이 점수를 내거나, 상대편의 아주 좋은 기회를 잘 막아내면 너무나도 신나고 재미있는 상황이 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좋은 기회에서도 점수를 하나도 내지 못하거나, 상대편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점수를 주게 될 때에는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고 말하면서 이 의외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에게 좋은 의외성은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나쁜 의외성은 그럴 수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처럼,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사실 그러한 판단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새벽, 잠을 자고 있는데 글쎄 모기한테 물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기가 어찌나 재빠른지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또 한 두 마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불만 껐다하면 윙윙대는 소리는 잠을 도저히 잘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요. ‘이 놈의 모기 때문에 내가 잠을 못 잔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모릅니다. 이 모기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저만한가요? 아니지요. 저보다도 훨씬 작지요. 제 손톱보다도 작은 모기 때문에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잘났다’고 교만해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점을 말씀하세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중에서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더욱 더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요. 이는 비록 겉으로는 옳게 산다고 하더라도 하느님보다도 위에 올라서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기도는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가슴을 치며 바치는 겸손된 기도는 그 사람이 지금은 외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일지라도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없이 부족하면서도 겸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반성하여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떳떳하다고 착각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한 세리의 모습을 갖추겠다는 결심을 감히 해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바리사이의 기도를 바치고 싶을 때가 종종 우리들에게 유혹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하지만 그 때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세리의 기도를 더 좋아하십니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땅바닥에 좁고 긴 판자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 위를 걸어보라고 한다면 걸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걸을 수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판자 위를 자신 있게 걸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좁고 긴 판자가 하늘에 닿을 듯이 높게 솟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판자 위를 자신 있게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많은 상금을 준다 할지라도 그 위로 걷는 것을 포기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록 쉽게 걸을 수 있는 판자 위라고 하지만, 높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 연결된 판자 위에서 혹시라도 떨어지게 된다면 큰 위험에 처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판자가 놓인 반대편 빌딩에 있다면? 또 당신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판자 위를 걷는 것뿐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내 삶을 헌신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큰 위험도 무릅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면서 그 위험을 피하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삶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삶을 지속해야 할 뚜렷할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 사명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시대는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의 세대로 주님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믿고 따르겠다는 주님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모습을 게을리 합니다. 바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귀찮다면, 또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면, 또 조금이라도 내게 피해가 올 것 같다면, 마치 빌딩과 빌딩 사이에 놓여있는 판자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는지 주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신이 헌신해야 할 대상을 현명하게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그 대상을 지키는 인생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주님임이 명백한데, 우리는 과연 누구를 선택하고 있습니까?
 
전교주일이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나는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었는지를 지금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며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님을 알리도록 합시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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