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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뿌스띠니아> 중에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6 조회수346 추천수2 반대(0) 신고
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물론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성호를 그으면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있으면 악이 있는 곳에 주님도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어떻게 하면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려워하면서 진땀을 흘릴지도 모르고 믿음이 있으면 악이 있는 곳에 주님도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럴 때에는 믿음을 청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끄시면서 여러분의 형제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는 것은 마귀의 장난이지만 내가 여기 있고 나는 십자가 위에서 악과 죽음을 물리쳤다.
그러니 나에게 손을 내밀어라. 마귀는 네가 가는 길에 분명히 딛고 지나가야할 디딤돌이다.” 따라서 믿고 여러분의 손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도 마귀를 등지고 걸어가라. 마귀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손을 뻗치셨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기만 하면 이런 일이 자주 생겨도 마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한 뿌스띠니끼로서 납작 엎드려서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약한 저를 도와주소서.”하고 울부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
뿌스띠니아는 하느님께서 사랑을 가르치시는 학교이다. 이 학교를 마치게 되면 원자 폭탄의 폭발도 장난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모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이 있는 뿌스띠니아로 오게 되면 이제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공헌하기 위하여 밖을 나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뿌스띠니끼는 서서히 순교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순교는 많은 측면을 갖고 있다. 아마 내일도 마돈나 하우스에 악한 사람들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이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들 안에서 조차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에 전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죽음을 당할지 누가 알겠느냐? 그러면 마지막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알렐루야!”하고 말할 것이다.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이런 아무 의미없는 순교를 잘 알았다.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 그가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원주민 투아레그(Tuaregs) 족(族)에게 의미 없는 죽음을 당했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제쳐두고 산 진정한 뿌스띠니끼였다. 그러나 그는 순교를 받아들이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자신을 보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내적인 순교로 그의 삶을 끝내었다.
다른 종류의 순교도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푸코가 순교한 것처럼 순교하지는 않을 것이다. 뿌스띠니끼는 다른 종류의 순교를 하게 되는데 뿌스띠니끼라면 그런 순교를 준비해야 한다. 자기 자신, 감정적인 자아와 직면하는 순교이다. 자신의 감정적인 자아와 맞서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열 살된 어린이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더러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런 사실에 직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순교의 시작이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뿌스띠니아의 문에는 빗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들어오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들오셔서 “이리 와서 우리의 여행을 더 멀리 떠나자.”하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감정적인 상태를 떠나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순교 여행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게 된다. 순교의 가장 극치의 순간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고 자신을 직면할 수 있게 된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은총이 가득한 시기로 어떤 의미에서는 순교여행이 끝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단계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신의 죄를 낱낱이 다 보게 된다. 자신의 죄를 본다는 것은 순교의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때기 되면 당황하지 않게 되고 절망하지 않게 된다. 순교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기름칠쳐지게 된다. 그리하여 덤덤해지면서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을 아는 이런 순교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뿌스띠니아는 이런 은총에 따라 뿌스띠니끼를 새로이 태어나게 한다. 그러나 뿌스띠니아 밖에서는 너무나 많은 일들에 얽매이게 되고 얽매이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받기가 훨씬 더 어렵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우울하게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은 뿌스띠니끼가 되면 절대로 우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울하게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뿌스띠니아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불행하게 느끼기 때문에 오히려 순례 여행을 떠나서 쉬지 않고 게속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공동체는 우울한 사람들을 감싸 안으려고 하지 않고 그 뿌스띠니끼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고 주교나 영적 지도자에게 편지를 써서 알려 준다.
 
순교는 계속 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야 고난이나 죄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더 많은 자비심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서양인들은 이런 자비심을 갖기까지 시간이 더 많이 것 같다.
 
영혼이 맑은 것과 마음이 맑은 것은 다르다. 나는 마음을 통하여 나의 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수덕(修德) 신학에서 권장하는 방법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의 맑음은 눈물의 선물로 얻어지게 된다. 울게 되면 그 눈물이 나의 죄와 다른 사람들의 죄도 씻어준다. 내 마음은 안정을 찾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눈물의 은총은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울게 된 것이다. 이제 내 마음도 깨끗해지고 내 영혼도 깨끗해져서 나는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은 뿌스띠니아가 이렇게 여러분을 이해시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내가 울 때 그리스도께서도 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눈물이 그리스도의 눈물과 함께 뒤범벅이 되면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나를 깨끗이 씻어주게 되는 것이다.
 
또 우울함과 슬픔을 구분해야 한다. 슬픔은 인간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이며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생기는 상태이다. 마치 하느님께서 손을 펴셔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여러분 앞에 전개되는 상태와 같다. 이는 성령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눈물의 선물을 주신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지만 울지 않으려고 애써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냥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멈추게 하셔야만 그치게 된다. 이는 결코 분노의 눈물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눈물도 아니다. 이는 인간이 억제할 수 없는 깨끗한 눈물이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시작하거나 멈출 수 없는 눈물이다. 그러나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절대로 당황하지도 않게 된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 눈물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 하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게 된다. 나는 그 눈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돌보시고 나와 함께 우시기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 울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교회에 가면 아주 행복하게 느낀다. 교회에 갈 때마다 한 두 송이의 꽃을 가져간다. 기분 좋게 교회에 도착해서는 무릎을 꿇는다. 한다. 나는 미사 시간이 되면 무척 행복하게 느낀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울기 시작한다. 왜 우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 교회에 올 때까지 불행하거나 슬픈 일이 전혀 생기지도 않았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갑자기 울게 된 것이다. 울고 있지만 나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다. 울음을 멈추려고 애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울음이 멈춰졌다. 그 뒤에 암만 생각해도 내가 왜 울었는지 무엇이 울음을 시작하게 만들고 무엇이 울음을 중단시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울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울게 만드신 어떤 일이 일어났고 하느님께서 나를 울게 만드셨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울면서 하느님을 울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눈물이 나의 죄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여러분의 의지나 감정에 따라 울었다면 그 눈물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눈물이지 하느님의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눈물이다. 그러나 뿌스띠니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하느님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들은 갑자기 울며 언제, 어떻게, 왜 울었는지를 모른다. 갑자기 울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영혼이 맑아졌다. 눈물로 맑게 된 영혼은 그 영혼에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으며 성자(聖者)가 되었다는 말은 더더구나 아니다. 우리 영혼을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해주셨다는 것을 뜻하며 교만하여 제 마음대로 살았던 자신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일도 교만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교만했지만 하느님까까이로 인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영혼의 맑음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눈물을 통하여 가장 순수해지고 눈물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준다고 믿는다. 우리의 눈물과 하느님의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괴롭히고 있던 외부의 일들에서 벗어나서 영혼을 깨끗하게 해준다. 그리고 눈물은 영혼을 진정으로 가난하게 하지 못하게 했던 내부의 모든 것을 씻어준다.
우리는 눈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인 자유에 감사하게 된다. 눈물로 씻어진 영혼은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하느님께 분명히 예와 아니오를 답할 수 있게 만든다. 뿌스띠니아에서는 하느님과 싸움인 예와 아니오의 갈등이 수 백 배로 커지게 된다. 어느 시점에 하느님에 대한 ‘예’가 여러분을 무화(無化)시키게 된다. 그러나 잠깐 동안이다. 하지만 이런 눈물과 갈등을 통하여 여러분의 영혼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다. 여러분이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는다. 곧 현실로 돌아오게 되지만 그날에 기적을 보게 된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껴두신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여러분을 알고 계셨다. 하느님께서는 진홍색 비둘기처럼 하느님의 불이 여러분에게 내리게 하셨다. 하느님의 불은 여러분의 머리 위에 있다. 여러분은 천천히 주님의 산에 오르고 있다. 산 꼭대기에 이르려면 하느님의 마음을 지나가야 한다. 하느님의 마음을 지나면 여러분은 횃불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아주 거대한 횃불이 되게 된다. 여러분은 산 꼭대기의 봉화불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불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산을 기어오르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뿌스띠니아에 오게 된다. 거기서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주 이상한 투명한 횃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분은 바로 그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는 횃불이다. 반대 편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손으로 올려지고 ‘예’하므로써 이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투명한 횃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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