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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운명이다! -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7 조회수1,068 추천수14 반대(0) 신고

운명이다!

                                             

 

 

    이른 아침,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신학원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헤라르도 신부님과 함께 글라라 수녀원에 주일 미사를 드리러 다녀왔습니다. 철저한 봉쇄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수도원답게 세상과의 단절을 대외로 선포하고 있는 듯,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담장이 저희를 반겼습니다.

 

    기타와 첼로, 그리고 멕시코의 몇몇 전통 악기들이 함께 화음을 이루어 성가를 연주하는 동안, 한 수녀님은 짙은 향 연기를 성당 전체에 뿌려 놓고 있었습니다. 밝고 가벼운 목소리로 비교적 빠른 라틴계 리듬의 성가를 부르고 있는 이십여 명의 수녀님들은 눈, 코, 입, 그리고 손과 맨발만 빼놓고 마치 영혼까지 수도복 속에 꽁꽁 싸서 소중히 감춰두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아직 스페인어 미사가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수도원의 전례 자체가 전해 주는 엄숙함 때문에 저는 미사 드리는 내내 약간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영성체가 끝난 뒤 헤라르도 신부님은 저에게 인사말을 하라고 시간을 내주었습니다.

 

    제가 한국외방선교회 소속 선교 사제로 언어 연수를 마치고 나면 깜뻬체 교구로 가서 일할 것이라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수녀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크게 질렀습니다. 그 짧은 무질서가 제 긴장감을 싹 달아나게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손님방에서 아침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식사라고 해 봐야 커피 한 잔, 오렌지 주스 한 잔, 그리고 또르띠야에 계란을 얹어 싸먹는 따꼬가 전부였습니다. 식사 중에 헤라르도 신부님은 마침 생일을 맞은 수녀님 한 분을 자기의 ‘hija(딸)’라면서 소개해 주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까 미사 중에 두 번째 독서를 한 키 크고 얼굴이 유난히 하얀 수녀님이었습니다. 어떻게 수녀님을 ‘hija’로 둘 수 있느냐 묻자, 헤라르도 신부님은 자기가 아프리카 케냐로 선교를 떠나기 전에 여기 수녀원에 들렀는데, 그때 열세 살 나이로 막 수녀원에 입회한 수녀님을 처음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두 분은 영적 ‘아빠’와 ‘딸’로 지금까지 기도와 미사 안에서 함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서른 살 생일을 맞은 ‘딸’과 쉰이 가까운 ‘아빠’가 밝은 표정으로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그들의 행복이 저에게 전염되었습니다.

 

    오전 열 시경에는 멕시코시티 공항에 나가 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한 젊은 신부가 중국으로 선교를 떠나는 날이었는데, 역시 헤라르도 신부님이 동행하자고 권유했습니다. 주차장에서는 여러 신부님과 신학생이 둥그렇게 모여 기타를 치면서 신나는 이별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나훔 신부님은 활짝 웃는 낯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뜨겁게 포옹을 나눈 뒤 차에 올랐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던 나훔 신부님은, 4년여의 유학 생활을 마친 뒤 처음으로 선교지로 떠나는 참이었습니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아시아를 향해 떠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에스떼반 신부님은 이곳 멕시코로 떠나던 날 기분이 어땠어요?”라며 되물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떠날 당시 어머니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아 조금 걱정스럽고 불편한 마음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나훔 신부님에게는 ‘아무 생각 없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도 별다른 감정이 없다고 하더군요.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절차를 마치고 나니 나훔 신부님의 지인 몇몇이 환송 인사를 하기 위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멕시코 사람들답게 공항 안에 있는 한 식당에 모여서 왁자지껄한 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이륙 한 시간 전이 되어서야 한 시간 반에 가까운 수다가 끝났고, 드디어 나훔 신부님이 국제선 출국 게이트 앞에 섰습니다. 다시 한 사람씩 포옹하고 헤어지는데 한 자매님이 연신 눈물을 닦으며 손을 흔들고, 나훔 신부님도 수차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서 있었습니다.

 

    환송객들은 꼼짝 않고 서서 나훔 신부님이 보안 검색대 뒤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별은 한국 사람들에게나 멕시코 사람들에게나 쉽지 않은 일 같았습니다.

 

- 성서와 함께 10월호에서

                   ▒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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