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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계승 <과> 영지주의 싸움 [지식의 교만]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8 조회수327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도'의 어원은 '파견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apostello이며
이의 명사형인 apostolos 즉, 사도는 '보내진 자' 또는 '파견된 자'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랍비들처럼 제자들이 스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을 받았고, 그분에 의해 권한을 받았다.
12 지파 : 이스라엘 생명의 열두 근원으로써 이스라엘의 기초가 된다.
12 사도 : 사도들은 새로운 이스라엘교회의 초석이 된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로서 그리스도 권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에페 1, 20; 1고린 3, 11)
<가톨릭대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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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계승이란 개념은
영지주의(Gnosticism)에 직면하며 2세기에 분명해졌다.
영지주의는 구원이 지식을 통하여 도래하며 이 지식은 선택된 소수에게 은밀히 전달된다는 주장인데, 
교회지도자들은 이에 반대하고 
진리는 만인에게 개방된 것이며 어느 가르침이 복음의 표현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기준은
그것이 모든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가톨릭대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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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영지주의 출판물 등으로 자신의 지식을 축적, 체계화하고
이런 부류의 여러가지 인간의 지식들(사상 철학  이념)
인간의 유일한 근원으로 여기는 몽상가들일수록
이단 영지주의 출판물등에서 흘러 나오는 온갖 가상의 생각 세상을
마치 큰 지혜인 양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믿음 (신앙)    <과>    지식 (이성) 
 
일부 개신교적 '자유로운 지식'의 발상
 <이단 영지주의 / 뉴에이지 / 한스 큉의 신학>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그대가 나( 예수님= 말씀 )를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복음서 20, 24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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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복음서 32, 6 - 8>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 6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오복음서 11, 6>

믿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둡니다 <1코린토서 2, 5 참조>

 

 파견된자, 소식의 전달자

하느님의 말씀 , 기쁜 소식은
성경분석가들( 혹은 신학자 )의 전용이 아니라
가난한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복음서 4, 16 - 19>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복음서 10, 2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코린토서 1, 19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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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을 '영적인 문자' 가 아닌
 
오직 '육적인 문자' 로만 보는 
의심(의혹)에 결박된 사상의 망상가들(지식을 유일한 근원으로 보는 몽상가)
 
 
개념에 의하여 대상을 사유하는 것이라면 계시의 사유도 다른 일반 대상의 사유와 형편이 크게 달라질 수 없으리라는 추측이 (인간의 철학적 사유 안에서) 강하게 작용한다. 그만큼 두 사유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 그런 까닭 때문에 '하느님의 진리의 순환'이란 명제를 주제화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철학적 사유에 따라) ''인간의 진리''로 만들려는 유혹과 구분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말한다. 
 
이는 믿음의 시련과 연관되어 있다. 신앙이란 결코 값싼 믿음(철학적 사유에 의한 분석)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참된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진리(말씀)를 위한 영적투쟁의 원천인 것이다. 이 말은 하느님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으로 드러나시는 곳, 하느님께서 하느님으로 말씀하시는 곳, 인간의 사변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진리가 우리의 사유를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하여 사실적이며 존재적 진리임을 증거할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계시) 하시는 하느님은 인간 가운데서 인간을 통해서 길을 내시는 분이다. 칼 바르트는 하느님을 생각한다(신앙적 사유에 따라). 하느님에 대한 말(철학적 사유의 개념)이나 하느님에 대한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에 대한 말씀 가운데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마치 하느님과 같이" (성경 말씀 있는 그대로) 사유한다. 하느님이 스스로 사유하는 길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성서 안에 하느님을 사유하는 길이다. 성서를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책(문자, 글)으로써만 보는 것(성경 분석)이 아니라 이 성서(말씀)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언어 중에서>
 
백인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 백인대장은 철학적 사유(성경 연구, 문자 분석)의 지식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의 언어 안(이면)에 먼저 주님으로 본 믿음 때문이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마태오복음서 8, 5 - 13]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하느님 홀로 하느님을 온전히 아신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52>  말씀은 말씀(예수님)께서 말씀(성경)을 말하셨다. 따라서 신앙적 사유는 그(말씀, 문자) 안에서 철학적 사유로 연구 분석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말씀)을 통하여 신앙적 사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바로 믿음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들 안에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그분께서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여 그들의 품위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698>  
 
 
 
<'하느님과 세상' ,  요셉 라칭거 추기경>
 
신앙은 진리를 말하고 이성은 진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앙이 우리의 이성에 대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은 인간정신이 진리를 보려고 날아 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 깨닫지 못하는데 어떻게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를 바라보기 위하여 비상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올바로 살고 진실로 평화롭게, 다시 말해 올바르게 서로 더불어 사는 법을 찾고자 한다면, 사람이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상이 더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다름아니라 두 날개 중의 하나인 신앙의 날개를 부러뜨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다른쪽 날개 -이성- 가 비록 많은 것을 이루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존재에 대한 핵심적인 깨달음으로 날아오르게 하는 것은 그 혼자만으로 불가능합니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신앙의 출발점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계시에 있고, 방법적으로는 신앙의 빛을 받은 인간 지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신앙과 이성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신학이 취급하는 문제는 게시된 사물 전부이지만, 그 많은 사물 안에서 신학이 찾는 진정한 대상은 하느님 자신이고, 다른 사물들은 하느님과의 관련 때문에 신학의 대상이 된다.

 

철학에서도 신을 논하지만, 모든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존재의 본체나 속성을 이성으로서 추구하지만, 신학에서는 신성으로서의 하느님, 즉 창조주시요 계시자이시며 강생 구속하시는 하느님, 우리 구원의 경륜을 펴시는 위격적(位格的) 하느님을 찾는다. 물론,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초점이 그리스도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느님을 알 수 있으니, 신학의 주체는 하느님 자신이요 방법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신학의 구성 원리는 인간 이성에 자명(自明)한 자연적 진리(상식철학)가 아니고, 신앙으로 받아들인 초자연적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전지하신 인식에 신앙으로 참여하여 감히 하느님의 계시를 이성의 능력한도 안에서 이해하고 정리하며 ... 신학은 신앙으로서 수용한 계시신앙의 지도를 받는 이성으로서 음미하는 노력이며,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이성의 빛만으로 종교를 연구하는 종교철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신학적 사변은 계시를 철학으로써만 관찰하는 종교철학이 아니므로 인간적 논리를 최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어떤 계시 진리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 결론이라도 다른 데서 명시적(明示的)으로 계시된 진리와 모순되면 이 논리적 결론은 포기되어야 한다.

 
 
게시자 참고사항 : 그노시주의자( 이단 영지주의, "예수는 신화다" 출판물 ) - 연결된 뉴에이지 사상 등 출판물은 믿음 보다 지식(앎)을 구원의 더 높은 차원으로 보며,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 지식을 구원의 유일한 원천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시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항상 이성에 의하여 '비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의문에 매인다. (의문은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매인다면 그것은 의심이 되는 것이다. 의심이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하여 '갈라진 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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