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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짜증을 내는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28 조회수513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17-27)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습도도 많았다. 습도가 많으면 불쾌지수가 높아지면서 짜증을 많이 낸다. ‘짜증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꼭 맞지 아니하여 발칵 역정을 내는 짓. 또는 그런 성미.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투정이 있다.
무엇이 모자라거나 못마땅하여 떼를 쓰며 조르는 일을 말한다.
대범하고 남을 배려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달리 소심하고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짜증을 많이 내는 것을 본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한 것도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이었다. 마르타는 주님께서 항상 오빠 곁에 계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였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과거부터 우리는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고 탐욕을 버리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를 짓고 살아 왔다. 모든 창조물이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듯이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왜 버스가 빨리 오지 않지? 왜 식사가 빨리 나오지 않지? 왜 이리 덥지? 왜 이리 춥지? 왜 전화를 안 받지? 무슨 통화가 그리 길어?
심지어는 자신의 몸이 아픈 것도 투정을 한다. 버스는 때가 되어야 오고, 식사도 때가 되어야 나온다. 이런 불만들은 모두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옛말이 있다. 자기 자신이 마음을 바로 먹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각을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살라는 말이기도 하다.
종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으로 명상을 제시하고 있다.
명상은 자기 성찰(省察)의 시간으로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죽어야 산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자아가 죽고 진정한 자기가 살아 숨 쉬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修行)의 핵심은 아집(我執)의 벽을 깨는 것이다.
집착의 벽, 자신에게만 갇혀 있는 견고한 성(城)을 부수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모든 가치 판단을 철저히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했다. “세상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가난 하지 않다는 것은 뭐든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탐하면서 가난으로 빠져든다. 또 그러면서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의 것은 나의 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명상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욕을 당할 때, 화가 나거나 하면 영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성숙된 상태이다.
내 안에서 육(Caro)과 영(靈)을 구분하지 않으면, 즉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육의 영향을 받고 육의 노예가 된다. 그러면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다.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 나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善)은 하느님의 것인데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을 훔치는 죄를 범한다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죄만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무소유의 삶이 가장 현명한 삶이다. 평화는 이렇게 시작되게 된다. 이를 거슬리게 되면 모든 것이 자신의 굴레가 되어버린다. 남에게 대한 나쁜 감정은 모두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된다. 이른바 자승자박(自繩自縛)을 하게 된다.
 
양(羊)은 방향감각이 없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이다. 제 맘대로 살고 있다. 자신의 욕심대로 목자 없이 살았다. 자신이 보고 옳다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로 인한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기쁨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야 53:6)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오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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